“끝~내줘요” 그래서 꾹저구탕...송강 정철도 반한 맛

박수혁 기자 2024. 8. 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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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강릉 연곡면 ‘연곡꾹저구탕’
강릉 연곡 꾹저구탕 모습. 박수혁 기자
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터줏대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가서, 뭘 먹어야 합니까?”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두 군데 마지못해 추천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이네요.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17개 시·도에 숨어 있는 ‘찐 맛집’을 소개하는 연재물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차례가 돌아왔다. 지난 3월 춘천의 매운 짜장면집 ‘명동 대화관’을 소개한 지 4개월 만이다. ‘벌써 차례가 돌아와선 곤란한데’라는 당혹감도 잠시, 부리나케 주위에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받는 사람마다 너도나도 춘천에 있는 유명 닭갈비나 막국수 집을 추천했다. “맛집이어도 너무 유명한 집은 안된다니까요. 그리고 춘천에서 닭갈비와 막국수는 너무 뻔하잖아요.”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맛있는 집은 다 유명해졌지. 맛있으면서 아직도 유명해지지 않은 집이 있겠어? 지금 유명한 집들도 처음엔 다 누군가의 숨은 맛집이었다니까. 맛집 소개는 일단 유명한 집 중에서 골라서 해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댓글로 욕먹어.” 강원도청 전길탁 행정국장이 충고했다.

역시 춘천은 ‘닭갈비와 막국수의 고장’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그래서 멀리 태백산맥 너머 영동지역으로 눈길을 돌렸다. 보이스피싱을 방불케 할 정도로 수많은 지인들에게 안부 전화를 빙자한 맛집 소개 민원을 넣었다. 속초 닭강정과 아바이순대, 생선구이, 강릉의 횟집과 순두부, 짬뽕, 꼬막무침… 뻔한 메뉴가 반복됐다. 숨은 찐 맛집은 대체 어디에?

그렇게 비슷하고 흔하디흔한 메뉴에 지칠 때쯤 고등학교 선배와의 통화에 귀가 번쩍 뜨였다. “박 기자, 흔한 맛집 싫으면 강릉에 있는 꾹저구탕 가볼래?” 강원도립대 심대섭 총무팀장이 말했다.

“꾹저구요?” “응. 추어탕처럼 조그만 민물고기를 넣고 끓인 매운탕인데 해장에 끝내줘.” ‘꾹저구’라는 어감이 주는 생경함과 ‘끝내주는 해장국’이라는 설명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결국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떡 본 김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던가? 강릉에서 시의원을 하고 있는 친구, 서정무에게도 전화했다. 강릉 간 김에 얼굴이나 보자는 욕심에서였다. 연곡면에 있는 꾹저구 식당을 간다고 하자 꾹저구탕 열혈팬이자 5대째 연곡에서 살고 있는 동료 시의원 김문섭(51)씨까지 소개해준다고 했다.

연곡꾹저구탕과 함께 먹는 감자밥과 추가로 주문한 은어튀김, 해물파전, 메밀전, 감자떡 등의 모습. 박수혁 기자

오래간만에 고향 선배와 친구를 만난다는 설렘에 지난 15일 오전 서둘러 집을 나섰다. 춘천에서 서울~양양고속도로를 1시간30분 정도 달려 남양양나들목(IC)에서 내려 국도를 탔다. 주문진수산시장과 영진해변을 지나 오대산국립공원 방향으로 10분 정도 더 가면 도로 바로 옆에 ‘연곡꾹저구탕’이라고 적힌 2층 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에 적힌 ‘신스(SINCE) 1985’라는 글자를 보니 더욱 믿음이 갔다.

아무리 초복이라고 하지만 20대 정도를 주차할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차들로 가득했다. 식당에 들어서자 80석에 이르는 넓은 실내공간도 손님들로 북적였다. ‘꾹저구탕’이 위치한 연곡면은 유명 관광지도 없이 고작 주민 6400여명이 사는 산골 마을인데다, 평일 점심때 강릉 시내와 차로 20분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해 좀체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반가운 이들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메뉴판은 볼 필요도 없었다. 사실상 꾹저구탕 단일 메뉴 식당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은어튀김과 해물파전, 메밀전, 감자송편 등 부가적인 메뉴가 전부다.

사람들로 붐비는 연곡 꾹저구탕 내부 모습. 박수혁 기자

주문을 하고 식당 벽에 붙어 있는 꾹저구탕 유래를 설명해 둔 글을 읽었다.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조선 중기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 당시 연곡면을 순방했는데 그날따라 바닷가에 바람이 몹시 불어 배가 나가지 못하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주민들이 마을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서 대접했다. 그랬더니 송강이 이를 맛있게 먹고 “이게 대체 무슨 물고기탕이냐?”라고 물었고, 그때까지 물고기 이름조차 모르고 살던 주민들은 “저구새가 꾹 집어먹는 고기로 끓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송강이 “그럼 앞으로는 ‘꾹저구탕’이라 부르면 되겠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로 시작하는 관동별곡뿐 아니라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으로 학창시절 많은 이들을 힘들게 했던 조선시대 천재 시인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당시 지어 준 이름이라고 하니 얼추 4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음식인 셈이다. 식당의 또 다른 벽에는 ‘연곡꾹저구네 장 담그는 날’이라고 적힌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에는 ‘정선에서 부모님이 직접 농사지은 콩과 고추로 정성을 다해 장을 담그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잠시 뒤 밑반찬과 빈 뚝배기에 이어 감자밥이 한가득 대접에 담겨 나왔다. 포슬포슬한 흰 쌀밥에 큼지막하게 자른 감자가 통째로 들어가 있다. 이어 커다란 냄비에 주인공인 꾹저구탕이 나왔다. 휘저어보니 수제비와 파, 부추, 깻잎, 팽이버섯 등 다양한 야채들이 넉넉하게 들어가 있다. 먹는 법은 간단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올려 5분 정도 더 끓여 수제비만 익으면 각자의 그릇에 덜어서 먹으면 됐다. 이때 취향에 따라 다진 마늘과 고추장, 산초 등을 정도껏 넣는 식이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먼저 국물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추어탕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깔끔하고 진한 국물 맛이 입안 전체에 퍼졌다. 칼칼한 고추장 맛과 깻잎 향이 어우러져 속을 확 풀어버리는 시원한 맛을 냈다. 양식이나 수입품이 전혀 없는 자연산 민물고기라서 흙 비린내가 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꾹저구는 손질한 뒤 갈아서 체로 거른 탓에 잔뼈 등 이물감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곡 꾹저구탕 식당 앞모습. 박수혁 기자

김문섭씨가 먼저 “어허~ 시원하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김씨는 연곡면에서 태어나 연곡면 이장협의회장을 거쳐 연곡면에서 시의원까지 하고 있는 지역 토박이다. “어릴 땐 식당 바로 옆에 있는 연곡천에서 온종일 놀면서 꾹저구를 참 많이도 잡았어요. 친구들과 여럿이서 잡다 보면 금세 한 주전자가 가득 찼어요.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가 가마솥에 된장을 풀고 온갖 야채를 넣어 두어 시간 푹 끓여줬는데… 지금도 꾹저구탕을 먹으면 40년 전의 잊을 수 없는 그 맛이 생각납니다.” 꾹저구탕을 먹는 김씨는 까까머리 10대 소년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났다.

김씨에게 뒤질세라 애주가로 유명한 심대섭 선배도 꾹저구탕에 대한 찬사를 늘어놨다. 심 선배는 “보통 춘천에선 술 마신 다음 날 다슬기나 순댓국 같은 걸 먹으러 가는데 연곡은 바닷가 마을이지만 민물고기인 꾹저구탕을 최고로 친다. 속이 확 풀리고, 후련하고 담백한 맛이다. 술 먹은 다음 날이면 맛집이 많은 것으로 소문난 주문진에서도 연곡면까지 단체로 해장하러 올 정도”라고 귀띔했다.

친구인 서정무는 “해장국으로도 유명하지만 꾹저구탕을 점심으로 먹은 날은 오후 내내 속이 너무나 편안하다. 기름기가 적어서 그런지 담백하고 소화가 잘된다. 그래서 술 먹지 않은 날도 자주 꾹저구탕을 먹으러 온다. 고향집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편안하고 푸근한 음식”이라고 추켜세웠다.

연곡 꾹저구탕을 운영 중인 배순녀 사장. 박수혁 기자

감자를 덜어 크게 한입 물고 뜨끈한 국물에 밥을 몇 술 말았다. 탄수화물이 들어간 탓일까? 넉넉하게 들어간 대파 등 야채가 더욱 시원한 단맛을 내고, 집에서 직접 담근 고추장은 얼큰하면서도 구수한 감칠맛을 뽐냈다. 사장 배순녀(63)씨는 ”모든 야채를 직접 재배하지는 않지만 감자와 고추, 콩 같은 건 직접 키우고 메주도 쒀서 1년에 한 번 고추장을 담근다. 맛의 비결은 직접 담근 고추장을 기반으로 냄새 안 나고 담백한 꾹저구의 특징과 신선한 재료가 잘 어우러진 덕분”이라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배씨가 꾹저구탕 장사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85년부터다. 뚝배기 5개를 사서 연곡천에서 포장마차식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1990년 인근인 동덕리에서 처음으로 가게를 열었고, 14년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배씨는 ”젊었을 때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서 많이 끓여 먹었는데 이걸로 장사하면 먹고는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작했다가 평생 꾹저구탕을 끓이고 있다. 예전에는 동해안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환경오염이 심해지면서 개체 수가 점점 줄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꾹저구탕의 재료로 농어목 망둑엇과의 민물고기인 꾹저구 모습. 박수혁 기자

연곡에서 배불리 꾹저구탕을 먹고 돌아와서 ‘꾹저구’를 검색해봤다. 길이 약 10㎝의 농어목 망둑엇과의 민물고기로 미꾸라지와 비슷하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날렵한 미꾸라지와 달리 머리와 입이 크고 두 눈 사이의 간격이 넓고 머리는 등 쪽에 불록하게 솟아 있는 것이 왠지 심술궂게 생겼다. ‘국가자연사연구종합시스템’에는 바닷물과 섞이는 국내 하천 전역에 살고 있다고 나온다.

실제 바다와 접한 하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만큼 지역마다 꾹저구를 부르는 이름도 각양각색이다. 강릉에서는 ‘꾹저구’라고 하지만, 양양에서는 ‘뚜거리’, 고성에서는 ‘뚝저구’, 삼척에서는 ‘뿌구리’ 혹은 ‘뚜구리’로 부른다. 동해안 주민들에겐 삶의 애환이 담긴 토속 먹거리로 통한다. 하지만 네이버 지도에서 ‘꾹저구탕’을 검색해보면 전국에서 강원도 강릉과 영월 2곳만 식당이 나올 정도로 희귀한 음식이 됐다. 강릉뿐 아니라 양양과 삼척 등에서도 꾹저구가 아닌 현지 이름을 내걸고 영업하는 식당이 있지만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 정도다. 배씨의 걱정처럼 꾹저구가 점차 자취를 감추면 후대에는 송강 정철이 감탄했던 꾹저구탕의 오묘함을 맛볼 수 없게 될까 걱정이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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