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식물 병해충’에서 얻는 교훈
[서울&]
미국 동남부 앨라배마주의 작은 도시 엔터프라이즈에는 목화의 해충인 ‘목화바구미’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20세기 초반 목화바구미 대발생으로 엔터프라이즈의 주 소득원인 목화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대체 작물인 땅콩 농사의 대성공으로 위기는 기회로 바뀌었다. 이후 세계 최대 땅콩 생산지가 된 엔터프라이즈 주민들은 기념비를 세워 목화바구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처럼 식물 병해충이 한 국가나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사회를 붕괴시킨 ‘감자 역병’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알려진, 감자 역병에 의한 대흉작은 당시 아일랜드인의 3분의 1을 죽거나 신대륙으로 이주하도록 내몰았다. 존 에프 케네디 미 대통령도 신대륙 이주민의 후손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진딧물의 일종인 ‘필록세라’는 유럽의 맥주와 위스키 산업이 도약하는 계기를 촉발했다. 신대륙의 필록세라가 1860년대 포도나무 묘목에 묻어 유럽으로 건너간 이후 유럽의 포도나무는 고사 위기에 빠졌다. 당시 유럽의 포도나무에는 이 해충에 대한 저항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유럽 와인 산업은 돌파구를 찾아 남미나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외연을 확장하면서 산업의 지형이 바뀌었다.
영국의 차 문화를 커피에서 홍차로 바꾼 ‘커피 녹병’도 병해충이 한 사회의 문화를 바꾼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커피 녹병으로 궤멸적 수준의 피해를 본 영국의 식민지 실론 지방의 작물이 커피에서 차로 대체되면서 남성과 상류층의 상징이었던 커피 문화가 자연스레 서민 중심의 홍차 문화로 바뀌었다. 차에 대한 사랑이 유별난 영국인들에게 차는 단순한 식문화를 넘어서는 의미가 있기에 커피 녹병이 영국의 사회·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앞의 여러 사례에서 우리는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볼 수가 있다. 자본 중심의 사회에서 농업도 이윤 창출의 도구가 되면서 넓은 면적에 단일 품종을 대규모로 재배하게 된 것이 병해충 대발생과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감자 역병의 경우 아일랜드 전역에 ‘럼퍼’라는 단일 품종이 재배됐고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감자는 병원균의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꽃가루의 자연수정 방지를 위해 개발된 웅성불임(Tms) 옥수수 단일 계통은 1970년 미국 전역에서 ‘옥수수 깨씨무늬병’에 치명적인 피해를 받았다. 최근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바나나 파나마병’은 이미 1950년대에 ‘그로 미셸’ 품종을 멸종시켰다. 후속 품종으로 개발되어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캐번디시’ 품종 역시 새로운 병원균 계통의 출현으로 크게 위협받고 있다.
식물 병해충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큰 피해를 준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감자 역병으로 인한 아일랜드 대기근의 피해자는 주로 하층민이었다. 중세 유럽 하층민의 주곡이었던 호밀에 생긴 일종의 곰팡이인 ‘맥각’은 발작과 이상 증상을 일으켜 여성이나 부랑자들을 마녀사냥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1977년 식량 위기에 처한 에티오피아에서 호밀의 맥각을 식량으로 삼은 예에서 보듯이 식물 병은 현재진행형으로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때 보았듯 병원균에 의해 숙주의 방어 체계는 쉽게 무너진다. 항생제의 지속적인 사용으로 항생제가 듣지 않는 슈퍼 박테리아도 출현한다. 모든 생물계는 서로 영향을 끼치며 ‘공진화’(共進化)를 한다. 생물계에 절대 승자는 없다.
대면적에서 단일 품종을 재배하는 현대 농업에서 병해충의 저항은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이제는 조금 유연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먼저 저항성 육종에서 단일 저항성보다는 다양한 저항성 스펙트럼을 가진 방향으로의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단단한 막대기는 쉽게 부러지지만 유연한 갈대는 잘 부러지지 않는다.
생물계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농업에 대한 고민도 필연적이다. 다양성이 무너진 생태계는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농업 생태계에서는 식물 병해충 대발생으로 인한 위험이 상존한다. 조금 늦더라도, 이익이 조금 적더라도 생태계 다양성을 우선시하는 공존의 지혜를 발휘할 때다.
그래픽 농촌진흥청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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