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낙화암에 출몰했다는 곰[박경일 기자의 인생풍경]

박경일 기자 2024. 8. 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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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부여에 갔다가 낙화암에 출몰했다는 곰 얘기를 들었습니다.

노인이 무용담처럼 들려준 얘기는 '백마강을 헤엄쳐온 곰 한 마리가 낙화암 아래로 기어 올라와서 아주 난리가 났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오래전 얘기라지만 백주 대낮에 유적지에 곰이 출몰했다니. 노인이 직접 본 게 아니라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는 것도 의심스러웠습니다.

달려 나온 10여 명의 동네 사람이 곤봉과 농기구를 들고 낙화암 아래로 상륙한 곰을 둘러싸고 대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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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부여에 갔다가 낙화암에 출몰했다는 곰 얘기를 들었습니다. 부여 관북리 유적지의 나무그늘 아래서 부채질하며 더위를 쫓던 노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가 얻어들은 이야기입니다. 노인이 무용담처럼 들려준 얘기는 ‘백마강을 헤엄쳐온 곰 한 마리가 낙화암 아래로 기어 올라와서 아주 난리가 났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오래전 얘기라지만 백주 대낮에 유적지에 곰이 출몰했다니…. 노인이 직접 본 게 아니라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는 것도 의심스러웠습니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을까. 오래전 신문기사를 뒤졌습니다. 노인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1931년 10월 15일 자 신문에 ‘낙화암에 곰이 출몰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신문기사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재현해봅니다. 곰이 나타난 건 10월 11일 오전 9시. 백마강에서 낚시를 하던 어부가 처음 곰을 목격했습니다. 강 건너편에서 헤엄쳐 오는 큰 곰을 발견하곤 구교리 마을 주민들에게 급히 알립니다. 달려 나온 10여 명의 동네 사람이 곤봉과 농기구를 들고 낙화암 아래로 상륙한 곰을 둘러싸고 대치했습니다. 기사에서 묘사한 ‘보기에도 엄청나게 큰 곰’이란 건 동네 사람들의 전언(傳言)이었겠지요.

위협을 느낀 곰은 고란사 쪽으로 내달리다가 동네 사람 한 명과 딱 마주칩니다. 곰과 맞닥뜨린 이의 이름과 나이가 기사에 나옵니다. 김원보. 나이 60세. 그가 몽둥이 하나로 곰의 길을 막으려다가 곰이 달려들면서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이걸 송복룡이란 사람이 보고는 곧바로 부여경찰서로 내달렸습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 낙화암 절벽 밑에 포위돼 있던 곰을 장총 45발을 쏘아 사살했습니다. 죽은 곰은 무게가 40관(150㎏)이 나갔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고기 팔아 20원, 웅담 팔아 50원 등 도합 70원의 수입을 올리는 횡재를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만, 기사는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곰과 격투를 벌인 김 씨가 얼굴과 두 팔에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했으니까요. 기사에는 그가 ‘매일 품팔이를 해서 어린 처자 다섯 식구를 근근이 먹여 살리던 가장 빈한한 사람이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곰과 용감하게 맞섰던 그는 부상에서 회복했을까요. 나무 그늘 아래서 이야기를 전하던 노인도 그 이야긴 안 해줬습니다. 분명했던 건 낙화암에 나타났던 곰이 오랫동안 부여 사람의 술자리 안줏감이 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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