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부터 ‘마스크걸’까지… 분장감독 송종희 “내 분장의 끝은 입” [베테랑의 한끗]
편집자주
베.테.랑.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무엇이 베테랑을 만드는가. 매일같이 사용하는 도구, 공들여온 시간, 오랫동안 지켜온 루틴이 그의 뒤에 있다. 차이는 결국 ‘한 끗’에서 결판난다. 베테랑을 완성시킨 그 한 끗의 디테일을 담는다.
“요즘 애들이나 할 법한 머리를 나더러 하라고?”
연기 경력 15년 차의 충무로 톱배우의 한마디였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한마디로‘못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가 맡은 영화 속 인물의 설정은 이랬다. 술 먹고 떠들기를 좋아하던 배 나온 중년의 아저씨,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산다’는 맥없는 좌우명으로 살았던 남자.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진탕 절어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영문도 모르고 납치돼 15년 동안 감금됐던 험난한 운명의 소유자.
분장감독이 제안했던 건 사자의 갈기처럼 사방으로 꼬불꼬불하게 뻗친 곱슬머리였다. 배우의 반응이 미지근하다고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보다 못한 영화감독이 나섰다. “송 감독이 고집을 안 꺾잖아요. 일단 한번 해봅시다.” 4시간 동안 머리를 볶고 나타난 그가 카메라 앞에 섰다. 지켜보던 현장 스태프들 모두가 조용히 동요했다. 세계적 걸작이 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 오대수(최민식)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분장감독의 이름은 송종희(55). 그가 30년째 빚어낸 한국 영화의 얼굴들은 전 국민이 안다. 영화 ‘접속’ 속 수현(전도연)의 윤기 나는 단발머리, 영화 ‘친절한 금자씨’ 속 이금자(이영애)의 시뻘건 아이섀도, 영화 ‘괴물’ 속 박강두(송강호)의 노란 탈색모, 영화 ‘아가씨’ 속 히데코(김민희)의 창백한 얼굴과 붉은 입술, 그리고 드라마 ‘마스크걸’ 속 주오남(안재홍)의 훤히 드러난 두피까지, 그의 분장은 캐릭터의 인생을 ‘한눈에’ 보이도록 압축한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이창동, 김태용, 정지우, 엄태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계의 ‘내로라’하는 영화감독들과 작업해 왔다. 29년 동안 단 1년의 공백기도 없었던 건 까다로운 대가들이 인정할 정도로 ‘공인된 베테랑’이어서다. 영화인들은 입을 모아 인정한다. ‘송종희에겐 송종희만의 스타일이 있다’고.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 손에서 어떤 비밀이 일어나는 거냐고.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비밀은 손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어요.”
베테랑의 도구 : 손보다 ‘머리’
그가 ‘손 쓰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 건 이십 대 중반을 훌쩍 넘겨서였다.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몰래 입시 미술 학원에 다녔다. ‘부모가 보내주지 않으니 내 힘으로라도 미대에 가겠다’며 내린 결단이었다. 학원 공부가 지겨워 딱 하루, 모델 일을 하던 친구를 따라 신촌으로 샌 그날, 운명이 바뀌었다.
친구의 얼굴 위로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이 쓱쓱 지나가니 ‘내가 알던 그 애가 맞나’ 싶었다. 거침없이 노련한 그 솜씨가 신기해 세 번을 연달아 따라갔다. ‘아, 사람 얼굴도 도화지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 길로 메이크업계에 뛰어들어 딱 3개월을 배우고, 곧장 현장에 투입됐다. 비디오 촬영 현장, 연극 무대, 신부 화장, 화보 촬영, 지면 광고용 메이크업까지. 손 안 대본 일이 없었다. 눈매는 진하게, 뺨은 발그레하게, 판에 박힌 듯 예쁜 얼굴을 만들어 내는 미용 분야엔 좀처럼 흥미가 붙지 않았다. 잘하는 사람도 많았다.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손기술로는 날고 기는 친구들을 이길 수 없구나.’
“그러다 처음 영화 현장에 가게 된 게 1995년이었어요. 이명세 감독의 ‘남자는 괴로워’ 팀이었죠. 현장에 처음 출근해 콘티를 받아보니 귀퉁이마다 감독이 밤새워 고민하며 적은 메모들이 빼곡했어요. 그게 마치 우리를 향해 열어 놓은 문 같았죠. ‘이리로 들어와서 같이 고민하자, 나를 좀 도와줘’라고 손을 내미는 그런 느낌이었달까요. 일을 하면서 알았어요. 난 배우에게 인물을 입히는 걸 좋아하는구나.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이런 게 성취감이라는 거구나.
1997년 영화 ‘접속’을 찍을 땐, 촬영장에서 대기하는 시간 내내 동현(한석규)과 수현(전도연)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어요. ‘네가 동현이었으면 어땠을 거 같아?’, ‘내가 수현이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 거야’. 빙 둘러앉아서 시나리오 한 권 놓고 끝도 없이 떠드는 거예요.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면, 막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툭, 툭, 툭 나와요.
그렇게 머리를 맞대던 시간이 좋았어요. 지금 이 인물은 어떤 감정에 휩싸여 있는 걸까. 배우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그 얼굴을 상상해 보고, 배우의 연기가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얼굴을 매만지는 과정이 즐거웠죠.”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영화 분장은 ‘손보다 머리’를 더 많이 써야 하는 일이라는 걸. 분장가의 임무는 감독이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 속 인물을, 배우의 얼굴과 몸 위로 꺼내어 펼쳐 놓는 것. 한쪽 머리는 감독의 입장에서, 다른 한쪽 머리는 배우의 입장에서 굴려야 했다.
“분장팀은 돈만 덜 받는 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처우가 한참 열악했어요. ‘배우 따라다니는 애들’로 통칭되기 일쑤였고···. 촬영 중에 배우의 화장이 망가지면 들어가서 수정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카메라 감독들이 호통을 쳤죠. 빨리빨리 안 나오고 뭐 하는 거냐고.
참 서러웠는데, 그런 와중에도 당돌한 요구를 했어요. 분장팀도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에 넣어달라고 한 거예요.”
영화 제작 단계는 3단계(프리 프로덕션-프로덕션-포스트 프로덕션)로 나뉜다. 프리 프로덕션은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사전 준비 작업을 뜻한다. 영화화를 위한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시나리오를 만들고, 캐릭터와 스토리에 대한 구체적인 설정을 결정하는 기획 절차다. 보통은 감독이 지정한 핵심 스태프만이 참여한다. 분장은 현장 촬영이 시작되는 프로덕션 과정에만 투입된다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제작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관행이었다.
“분장팀이 프로덕션 단계에 들어가면, 제안할 수 있는 콘셉트의 범위가 턱없이 좁아져요. 당장 촬영을 시작해야 하니까 시간이 없거든요. 머리를 써볼 여유 없이 바로 손부터 써야 하는 거죠. 어쩔 수 없이 배우가 원하는 대로 타협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무난하고 흔한 모습만 나와요. 완성도가 떨어지는 거죠.
처음엔 이렇게 요구했어요. ‘돈 달라고 안 할 테니, 프리 회의에 넣어라도 달라.’ 물론 저 혼자 들어갔죠. 내 팀원들까지 무급으로 일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분장도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걸 몸소 증명해야 했다. 그때부터 시나리오를 받으면 수험생처럼 파헤쳤다. 주인공의 직업, 나이, 세대, 관심사, 시나리오상 시대적 배경, 당시 복식 스타일과 생활상까지 빈틈없이 공부했다. 인터넷 검색 같은 게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서울 시내 대형 도서관만 뒤진 게 아니라, 각종 연구소와 자료원까지 샅샅이 털었다. 신문, 잡지, 책에서 수집한 사진들만 모아도 책 몇 권은 거뜬히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생긴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지금도 작품 하나를 준비할 때마다 자료집이 수십 장씩 나와요. 후배들한테도 말하죠. ‘절대 맨땅에 헤딩할 생각하지 마라. 인물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갑자기 툭 나오는 게 아니라 성실함에서 나온다. 네가 만들고자 하는 인물에 대한 자료를 가능한 대로 다 모아라.’ 일단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부터가 시작이거든요.”
머리를 굴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고민이 생겼다. ‘한 인물이 가진 내면의 일부를 어떻게 ‘외모’로 보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고민의 결과가 ‘올드보이’의 갈깃머리였다. 배우의 반대에도 그가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 지독한 곱슬머리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오대수의 삶 자체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구부러진 머리카락을 갖고 태어났는데, 회사에 다닐 때는 이발소에 가서 쭉쭉 펴고 다녔던 거예요. 8평짜리 감옥에서 15년 동안 갇혀 지내며 타고난 내면이 다시 고개를 내민 거죠. 그러니까 갈깃머리는 오대수란 인물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거예요.”
‘올드보이’가 세계적 흥행을 하며, 영화인들 역시 저절로 알게 됐다. 잘 만든 분장은 단번에 캐릭터의 인생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는 걸.
베테랑의 루틴 : 캐릭터의 전사를 상상한다
“미모스(송종희 분장감독이 이끄는 팀)가 일하는 거 보면, 다들 연출부 저리 가라야.”
현장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연출부 같다’는 건 그만큼 이야기에 깊숙이 관여한다는 뜻이다. 여러 사람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 이유가 있다. 시나리오에 없는 ‘설정의 빈칸’을 채우는 그만의 루틴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시나리오를 받으면 아주 천천히 읽어요. 그리고 수없이 반복해 읽어요. 주변에서 ‘너 그거 대체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거냐’고 물을 정도로 읽죠. 인물이 움직이는 모습이 장면으로 어느 정도 그려지면, 노트를 펼쳐서 키워드를 적어 내려가요. 영화 속 캐릭터가 시나리오 밖에선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지 상상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래요. 이 인물의 MBTI는 뭘까. 길을 걸을 때 음악을 듣는 사람일까, 안 듣는 사람일까. 음악을 듣는다면 어떤 장르를 좋아할까. 주말에 나들이를 간다면 공원, 한강, 산, 바다 중 어디로 갈까. 대학에선 뭘 공부했을까. 부모님은 어떤 사람일까. 가족과의 관계는 좋을까, 나쁠까. 주말에 영화관에 가면 어떤 장르를 선택할까. 남몰래 보려고 숨겨둔 컴퓨터 속 폴더엔 뭐가 담겨있을까.”
인간의 얼굴은 부모가 낳아준 그대로 자라지 않는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살아온 시간이 배어든다. 자주 겪은 감정, 습관처럼 지은 표정,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자세 등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기 마련이다.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관 안에서 인물의 사실성을 극대화하려면, 그런 시간의 흔적을 담아내야 한다.
‘당신이 배우도 아닌데, 거기까지 고민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한다. ‘분명히 달라진다’고. “어떤 작업이든, 완성도는 디테일에서 갈리는 법이니까요.”
인물의 ‘전사’(前史·pre-history)를 빼곡하게 설계한 분장은 어떻게 다를까. 드라마 ‘마스크걸’에서 배우 안재홍이 열연한 인물 ‘주오남’의 시나리오상 설정은 ‘대인기피증을 앓는 못생기고 소심한 변태 오타쿠’였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간 콘셉트를 제시했다. 붉게 부풀어오른 아토피 피부염, 어린 시절 뜨거운 물에 데인 흉터, 검고 푸른 몽고반점… 이 모든 지저분한 흠결을 지우기 위해 성형외과 단골이 됐다는 설정이었다. 실제 드라마엔 ‘아토피 피부염’ 설정만 들어갔는데, 이는 원작 만화나 초기 시나리오에 없었던 장치다.
“몽고반점과 아토피 피부, 화상 자국은 ‘부모가 물려준 유전자적 상처’였어요. 주오남의 어머니 김경자(염혜란)의 죄책감과 연결되는 상징이었죠. 김경자는 아들에 대한 죄책감을 동력으로 평생 복수에 나서거든요.”
작은 분장의 디테일이 ‘모자 관계’에 얽힌 원망과 죄책감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이자 연결고리가 된 거다.
35세의 청년 박해일 배우를 70세의 노장 시인 이적요로 바꿔놓았던 영화 ‘은교’는 어땠을까. 매일 6시간씩 걸렸던 초고난도 특수 분장으로 화제가 됐던 작품이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단순히 특수 분장 기술로만 승부를 본 작품은 아니었다.
“정지우 감독은 전형적인 노인이 아니라 지적이면서도 매력 있는 노인을 새롭게 창조해내주길 바랐어요. 그래서 무리수라는 걸 알면서도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선택한 거예요. 현재의 박해일이 가진 목소리, 말투, 특유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자 했으니까.”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땐 “감독님 그거 미친 짓이에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만들고 싶은 노인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 묘하게 설득이 됐다. 마침 밴쿠버필름스쿨에서 가장 최신의 특수 분장 기술을 배우고 귀국한 때였다. 그 ‘미친 도전’에 합류해 보기로 했다.
“3주 동안 종로3가 탑골공원으로 출근해 현실 노인들을 공부했어요. 뒷짐을 지고 걷는 뒷모습, 발을 움직이는 속도, 피부에 핀 검버섯, 얼굴마다 다른 주름살… 간혹가다 신사처럼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할아버지를 보면, 옷차림, 행동거지, 눈빛,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봤죠. 노인들은 다 비슷한 모습일 줄로만 알았는데, 그 안에도 정말 다양한 모습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계속 보다 보니 60대, 70대, 80대, 90대를 구분할 수 있게 됐죠. 노인들의 커뮤니티 내에서도 젊음과 늙음이 갈리더라고요.
한 번은 제법 친해진 어르신한테 ‘나이 들어 가장 서러운 게 뭐냐’고 물었어요. ‘시선을 끌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게 가장 슬프다’는 대답이 돌아왔죠. 커피숍이든, 도서관이든, 지하철이든 어떤 공간에 들어섰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으니, 내 존재가 사라진 것처럼 가벼워졌다고. 그럴 땐 당장이라도 죽고 싶어진다고.”
바로 그 말이 이적요란 캐릭터를 열 단서였다. 존재가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쓸쓸함이야말로 이 영화가 다루고자 했던 핵심 정서였으니까. 실리콘으로 피부를 덧대는 특수 분장술은 그 구현 과정을 거들었을 뿐이다.
캐릭터의 삶을 ‘해부하듯’ 분석하는 그의 작업 루틴을 두고 어떤 배우, 어떤 스태프는 ‘유난스럽다’, ‘극성스럽다’고 수군거리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게 작품 속 인물의 전사에 이토록 집착하는 분장 감독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그 말이 참 싫었다고 한다. 밑그림을 탄탄하게 그리는 게 왜 중요한지, 몰라주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 귀로 들으면 다른 귀로 흘려요. 이젠 경험으로 알거든요. 결과로 증명해 보인다면, 누구도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걸. ”
베테랑의 시간 :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것, 단 '아낌없이 부을 때'
영화판에 입성한 지 올해로 30년째, 그의 필모그래피 53편을 나열해 놓고 보면, 그 자체로 한국 영화의 역사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90년대 충무로의 샛별이었던 배우가 한국 대중문화의 대들보로 성장해 가는 걸 봤다. 전도연, 송강호, 최민식, 김혜수, 이병헌, 설경구, 박해일, 이영애...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독보적 자산이 됐다.
“어떤 배우와 여러 번 만나면, 전작에서 내가 썼던 패턴을 이용할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어요. 이미 경험치가 쌓여있는 거죠. 이 사람의 얼굴에서 어떤 포인트가 가장 매력적인지 알거든요. 그 위에 새로운 탐구가 또 쌓이는 거예요.”
3년 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찍을 땐, 배우 이병헌한테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 이병헌이 잘생기고 연기 잘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번엔 제대로 망가져 보는 거 어때요? 완전히 냄새 나는 아저씨로요." 이병헌 배우를 20대 ‘청춘스타’ 시절부터 지켜봐 왔던 그였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30년 차 베테랑 스태프이다 보니, 감독들 입장에선 너도나도 탐을 내는 일꾼일 터. 때때로 ‘인물의 콘셉트만 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캐릭터의 외양만 디자인해 주면, 구현하는 건 다른 손을 빌리겠단 뜻이다. 그런 제안은 고민의 여지도 없이 단칼에 거절한다. ‘머리와 손을 분리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머리 굴려 만든 콘셉트를 구현하는 건 결국 이 두 손이에요. 매일매일의 디테일이 쌓여서 완성도가 되는 거거든요. 한 번 변신시키면 끝인 게 아니라, 그 설정을 촬영이 진행되는 몇 개월 동안 똑같이 유지해야 하니까요.”
여러 작품에 자신의 시간을 분산시키지 않는다는 건, 그의 작업 원칙이기도 하다. 시간은 계산하지 않고 아낌없이 붓는다.
현장에서 만나는 후배들은 종종 묻는다. ‘한 길을 어찌 그리 오래 판 거냐’고. 그의 답은 늘 같다. ‘계획 같은 건 하나도 없었고, 오직 순간의 성실함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밖에서 영화라는 일을 바라보면 참 화려해 보여요. 분장도 왠지 그럴 것 같죠. 매일 톱스타를 보고, 그들의 얼굴을 만지는 일이니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번뜩이는 영감이나 대단한 천재성에 기대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전 믿을 게 하루하루의 성실함밖에 없었어요. 말주변도 없고 소심한 내가 가장 할 수 있는 건, 잘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쏟는 거였죠.
이쯤 되니 알겠어요. 시간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베테랑의 한 끗 : 배우를 섬긴다
-당신을 ‘베테랑’으로 만든 한 끗은 무엇인가요.
“나와 함께 일하는 배우를 섬긴다는 것. 그들이 최선의 컨디션에서 연기할 수 있도록, 모든 면에서 돕는다는 거죠.”
송 감독은 배우 설경구와 영화 ‘나의 독재자’를 작업할 당시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최고의 분장은 배우의 연기예요.” 그 말이 강한 잔상을 남겨서인지, 배우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그의 말을 여러 번 인용했다.
-’분장이 배우를 넘어서게 하지 않는다’는 당신의 오랜 원칙과도 연결되는군요.
“맞아요. 치기 어린 시절엔 내가 잡아 놓은 콘셉트를 어떻게든 배우에게 입히려고 했어요. 그럴싸하게 구현되기만 하면 만족스러웠죠.
이 일을 오래 해보면서 알게 됐어요. 배우는 영화의 모든 과정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란 걸.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최고로 편안한 모습, 최고로 자신감 있는 자세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도록 돕는 거라는 걸.”
-어떻게 배우를 섬기나요.
“손으로 하는 분장을 다 끝내고 나서 ‘입으로 하는 분장’이 있어요. 배우가 시나리오 속 캐릭터가 될 수 있게끔 말로 북돋워 주는 거예요.
요즘은 배우 고아성씨와 함께 작업하고 있는데요. “아성아, 오늘 너무 예뻐”라는 말만 한 천 번은 했을 거예요. 현재 촬영 중인 영화 ‘파반느’에서 고아성 배우가 연기하는 주인공 미정은 설정상 ‘못생긴 여자’거든요. 근데 전 이 ‘못생김’을 진짜 추한 모습이 아니라, 물과 기름처럼 세상과 섞여 들지 못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미정이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도 사랑하게 되고 점차 세상과도 섞이게 되는데, 그 감정의 흐름에 따라 그녀의 얼굴도 변해요. 얼마 전 촬영이 끝났는데 아성 배우가 말하길, 아이러니하게 이 영화를 하면서 예쁘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대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행복하던지.
어쩌면 그들에게 제 방식대로 확신을 주고 싶은 것 같아요. ‘잘하고 있어, 이게 우리의 정답이야’라고.”
9년 전, 영화 ‘차이나타운’을 작업했을 당시, 그는 배우 김혜수의 허리에 보형물을 가득 밀어 넣어 두둑하게 흘러내리는 뱃살을 만들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윤기 없이 뻣뻣하게, 탱탱했던 피부는 탄력 없이 늘어져 보이게 분장했다. 관능미의 화신과도 같은 그녀를 뼛속까지 노회한 사채업자 대모로 만든 거다. 엄청난 모험이었다.
당시 이 영화의 미술을 맡았던 이목원 미술감독이 촬영 중 넌지시 물었다. “송 감독님은 이렇게 큰 모험을 하면서 어떻게 확신을 가져요?” 그가 대답했다. “확신이라는 게 어디 있어요. 나도 없어요. 감독이니까 올 때까지 ‘그게 있는 척’하면서 주장을 할 뿐이죠. 내 팀원들에게, 또 나의 배우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감독’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의 무게를 정확히 아는 그 마음, 이 마음이야말로 베테랑 송종희의 숨겨진 한 끗이 아닐까.
잠깐, 나가기 전에
‘베테랑의 한끗’은 디지털 인터랙티브 콘텐츠로도 제공합니다. 커리업닷컴에서만 공개되는 분장감독 송종희의 작업실 풍경, 그의 29년 필모그래피 등을 확인해 보세요. 특별한 볼거리가 담긴 페이지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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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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