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피는 못 속여’ 그 엄마에 그 아들, 모자 메달리스트 길영아 김원호

김종석 2024. 8. 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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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화순에서 열린 전국학교대항대회에 출전한 초등학생 김원호와 어머니 길영아 삼성생명 감독. 김종석 제공

[김종석의 그라운드] 한국 스포츠 역사에 보기 드문 모자(母子) 메달리스트가 나왔습니다. 길영아(53) 삼성생명 배드민턴단 감독과 아들 김원호(25·삼성생명)가 그 주인공입니다. 길영아 감독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김동문(현 원광대 교수)과 금메달을 합작했습니다. 그로부터 28년이 흘러 김원호는 2024년 파리올림픽 혼합복식에서 정나은(24·화순군청)과 함께 은메달을 확보했습니다.

김원호는 1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포르트드라샤펠 경기장에서 열린 배드민턴 혼합복식 준결승전에서 서승재(삼성생명)-채유정(인천국제공항) 조를 2-1(21-16 20-22 23-21)로 누르고 결승에 올랐습니다. 길영아 감독은 애틀랜타 올림픽 결승에서 ‘배드민턴 대통령’으로 불리던 박주봉 현 일본 대표팀 감독과 나경민 현 한국체대 교수 조를 만났는데 열세가 예상됐지만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세계랭킹 8위 김원호 역시 준결승에서 맞붙은 서승재와 채유정의 세계랭킹이 2위로 쉽지 않은 상대였지만 역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이날 김원호는 경기 도중 비닐봉지에 구토할 정도로 힘겹게 경기를 풀어간 끝에 풀세트 접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김원호는 이번 은메달 확보로 병역 특례 혜택까지 보너스로 챙기게 됐습니다. 경기 후 김원호는 “이제 제가 길영아의 아들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김원호의 엄마로 살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파리 현지에서 경기를 지켜본 길영아 감독은 “눈물 나고 짠하고 기특하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 자랑스럽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2024년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 결승에 진출한 김원호가 환호하고 있다. 김원호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혼합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길영아 삼성생명 감독의 아들이다.
대한배드민턴협회 제공

13년 전인 2011년 필자는 전남 화순에서 열린 이용대 올림픽제패기념 화순 빅터 전국학교대항배드민턴선수권대회에서 길영아 모자를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수원 태장초교 6학년이던 12세 김원호는 피는 속일 수 없다는 듯 초등학교 무대에서 30연승을 질주하며 셔틀콕 꿈나무로 주목받았습니다. 배드민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스냅과 스텝이 타고났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네 살 때 아들이 처음 배드민턴 채를 잡았을 때 엄마는 반대를 심하게 했습니다. 길 감독은 “운동선수의 삶이 힘들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반대했는데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엄마의 그늘에 가릴까 봐 걱정했고 주위에서 길영아 아들이니까 기회가 많다는 얘기를 들을 때 속도 상했는데 스스로 잘해줬다”라고 대견스러워했습니다.

스포츠 세계에서는 어머니(아버지)의 뒤를 이어 같은 운동에 뛰어든 사례가 꽤 있습니다. 

한국 축구의 전설 차범근 씨의 아들 차두리는 축구장에 있는 동안 아버지의 높은 벽을 늘 실감해야 했습니다. 늘 ‘차범근 아들’이란 타이틀이 따라다녔던 그는 국가대표로도 활약하긴 했어도 은퇴 기자회견에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더 느끼게 됐다”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번 파리올림픽 골프에 출전한 안병훈은 탁구 스타 커플인 안재형 씨와 중국인 자오즈민 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안병훈이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건다면 아버지(1988년 서울 올림픽 탁구 남자 복식 동메달)와 어머니(1988년 서울 올림픽 여자 복식 은메달, 단식 동메달)에 이어 세 가족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됩니다.


테니스 정현 가족. 왼쪽이 어머니, 가운데는 형 정홍, 오른쪽은 실업 테니스 선수 출신 정석진 전 삼일공고 감독

테니스에도 2대에 걸친 라켓 인생이 눈에 띕니다. 호주오픈 4강에 올랐던 정현과 형 정홍은 실업 테니스 선수 출신인 정석진 전 삼일공고 감독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테니스 선수 출신인 손영자 전 대한테니스협회 회장 직무대행의 두 딸인 정영원과 정보영 자매는 NH농협은행에서 활약했습니다. 축구 스타 이동국의 딸 이재아도 테니스 선수입니다. 부상으로 코트를 잠시 떠나 있는 동안에는 수준급 골프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성지현 한국 배드민턴 대표팀 단식 코치는 성한국 전 대표팀 감독과 국가대표 출신 김연자 씨의 딸입니다. 성 코치는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린 뒤 지도자로 변신해서는 세계 랭킹 1위 안세영을 담당해 탄탄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NH농협은행 여자 소프트 부를 이끄는 유영동 감독의 아들 유기상은 프로농구 LG에 입단해 신인상을 받았다. 유영동 감독 제공

NH농협은행 여자 소프트테니스(정구)부 유영동 감독은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을 5개나 수집한 코트의 전설입니다. 부인도 정구 선수 출신. 아들 유기상은 농구 선수로 활약하며 용산고와 연세대를 거쳐 프로농구 LG에 입단해 평생 한 번뿐인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유 감독의 키는 193cm이고 유기상은 190cm입니다. 

농구 코트에서는 유독 농구인 2세 선수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허재 전 대표팀 감독의 아들 허웅(KCC)과 허훈(KT) 형제는 2대에 걸쳐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성정아 전 여자농구 대표선수의 아들 이현중은 미국 진출을 노리고 있습니다. 경희대와 삼성전자에서 농구한 이창수의 아들 이원석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로농구 삼성에서 뛰며 유망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타고난 운동 능력은 2세들에게 분명 플러스 요인이 되지만 김원호의 소감처럼 ‘스타 플레이어 누구의 아들(딸)’이라는 꼬리표는 무거운 짐으로 어깨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스포츠에서는 부모 능가하는 자식이 없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죠. ‘부모 찬스’를 쓴다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도 존재합니다. 프로농구 최다 우승 사령탑인 유재학 KBL 경기본부장은 농구 선수를 원했던 아들의 바람을 끝내 만류했습니다. 유 본부장은 “운동으로 뭔가를 이루기는 너무 힘들기에 못 하게 했습니다. 키가 어중간하기도 하고요”라고 말하더군요. 


한국 배드민턴 대표팀 혼합복식 선수 김원호와 파트너 정나은의 플레이 모습. 대한배드민턴협회 제공

다시 김원호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김원호는 엄마의 선수 시절 모습을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자주 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엄마의 네트 플레이는 정말 대단했다. 배울 점이 참 많다”라고 말하더군요. 길영아 감독은 “팀을 맡고 있어 변변히 뒷바라지도 못 해줬다. 가끔 잘 먹이는 것 말고는 해준 게 없다”라고 미안해하기도 했습니다.

11년 전 꼬마 김원호는 “엄마나 엄마 팀에서 뛰는 이용대 형처럼 올림픽 금메달이 목표다. 체력과 힘을 길러야 한다”라고 당차게 다짐했습니다. 이제 그 꿈에 딱 한 경기 남았을 뿐입니다. 대망의 결승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할 아들에게 엄마는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올림픽 무대는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것이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면 된다.” 2대에 걸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셔틀콕 모자는 이미 메달 색깔을 초월했을지 모릅니다. 

만리장성에 비유되는 세계 최강 중국의 높은 배드민턴에 맞서 후회 없는 한판을 기대해 봅니다.

김종석 채널A 부국장
(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글= 김종석 기자(tennis@tenn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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