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 남북관계’ 北호응 가능성 낮은데…수해지원 제의한 배경엔
국제기구 아닌 직접지원 선택…대한적십자사 명의 제의
北호응시 모멘텀…호응없어도 ‘인도적 지원은 무관’ 강조
‘적대적 두국가’ 선언한 北에 “北주민도 대한민국 국민”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정부가 수해 피해를 입은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공식 제안했다. 남한을 ‘적대적 국가’로 선언한 북한이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은 상황에서 강경 대북정책을 펼쳐온 윤석열 정부가 인도적 지원 카드를 꺼낸 것은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한적십자사는 1일 오후 5시 “우리측은 북한 주민들이 처한 인도적 어려움에 대해 인도주의와 동포애의 견지에서 북한의 이재민들에게 긴급히 필요한 물자들을 신속히 지원할 용의가 있다”며 “지원 품목, 규모, 지원 방식 등에 대해서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회와 협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조속한 호응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한적십자사 명의 발표…‘인도적 지원’ 강조하며 유연한 접근=인도적 지원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힌 주체는 대한적십자사다. 1970년대 남북 간 첫 대화의 시작이 남북 적십자 회담이었을 정도로 이산가족 상봉, 인도적 지원을 위한 남북 대화 채널의 시작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인도적 지원 예산은 통일부 남북협력기금이 사용되는 만큼 실질적으로는 정부 차원의 제안이다. 그럼에도 발표 주체를 대한적십자사로 한 것은 정부의 제의가 북측에 유연하게 전달되게 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날 박종술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은 “먼저 폭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북한 주민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고 밝혔다.
지원 제안도 대한적십자사의 공식 브리핑을 언론 보도를 통해 전달하는 형식이다. 지난해 4월7일 남북 직통 연락선이 단절된 뒤 복원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별도로 전달할 창구가 없기 때문이다.
▶UFS 앞두고 민감한 시기…‘적대국가 지원’ 호응 가능성 낮아=그만큼 현 남북관계는 냉랭하다. 탈북민 단체의 대북전단지 살포와 북한의 오물풍선 살포가 이어지고 있고, 9·19 군사합의 파기로 비무장지대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있다. 북한의 선택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러시아였다. 군사동맹 수준의 북러 신조약을 체결하며 남북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오는 19일부터는 북한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한미연합 군사훈련 ‘을지 자유의 방패’(UFS·을지프리덤실드)가 실시된다. 북한은 지난 5월15일 UFS에 대해 “재앙적인 후과에 대해 먼저 숙고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상황을 종합할 때 북측이 남측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수해 피해현장을 직접 찾아 현장지도에 나선 상황에서 남측의 도움을 받는다면 리더십에 상처를 입을 것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인 2022년 5월 통일부는 코로나19에 대응해 협력하자는 남북 실무접촉을 제안하려 했지만, 북측이 전화통지문 접수를 거부해 무산된 전례도 있다.
2000년 이후 북한에서 수해가 발생해 남한이 인도적 지원을 제공한 사례도 단 4차례(총 1297억원)에 불과하다. 2011년 집중호우와 태풍 메아리·무이삭 피해를 입었을 당시에는 북측이 응답하지 않았고, 2012년 집중호우 및 태풍 볼라벤 수해 당시에는 북한이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 대북정책을 고수해 온 윤석열 정부가 북측에 인도적 지원을 제안한 배경에 주목된다.
▶北호응시 대화 모멘텀·호응 안해도 대북정책 기조 선명성=최근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는 장마철을 대비해 구호물자를 사전 배치했고 사용 논의를 북한 당국과 하고 있다고 미국 공영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밝혔다. 냉랭한 남북관계와 강경 대북정책을 고려하면 이미 북측과 지원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이 수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남북 간 직접 지원을 선택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북측이 호응을 해온다면 인도적 지원을 계기로 남북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모멘텀을 확보할 수 있다. 북측이 호응을 해오지 않는다고 해도 ‘억제-단념-대화’(3D)의 비핵화 협상을 추진하면서도 정치·군사적 상황과 무관하게 식량난이나 자연재해 발생시 긴급 구호를 실시한다는 대북정책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정책기조가 훼손될 우려는 없다.
아울러 정부는 북한이 매체를 통해 연일 폭우 피해 상황을 공개하는 것에도 주목했다. 김 위원장이 직접 고무보트를 타고 피해 현장을 살펴보는 장면이 공개됐고, 사회안전상과 자강도 당 책임비서를 즉각 경질할 정도로 민심 이반을 경계하고 있다.
현재까지 공개된 폭우 피해는 규모로만 보면 역대 최악은 아니다. 2020년 집중호우와 태풍 마이삭으로 북한 전역에서 주택 1만6680여 세대가 파괴 또는 침수됐고, 농경지 3만9296정보가 침수 피해를 입은 적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전날 “2010년, 2016년 2020년에 비해 절대적인 피해 규모가 큰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올해 피해) 규모를 상세하게 보도한 것은 아닌 만큼 후속 동향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북한이 이번 수해 피해 현장을 연일 공개하는 것은 러시아와 중국에 보내는 메시지일 가능성이 높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달 31일 홍수 피해에 위로를 전하면서 “양국이 적시에 홍수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으로 적절히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만 밝혔을 뿐, 현재까지 지원 의사를 공식화하지는 않았다.
전통적인 우방국인 중국과 러시아보다 선제적으로 지원 의사를 밝히면서 우리 헌법상 명시된 단일국가론을 강조하려는 의도로도 풀이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14일 제1회 북한이탈주민의날 기념식에서 “북한 주민들은 대한민국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밝힌 바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전날 ‘북한이 적대적 두국가를 선언하며 단절에 나서는 상황인데 정부가 수해 지원을 제의한 의의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인도적 위기 상황에 대해서는 정부가 언제든지 인도적 지원에 열려있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해 왔다”며 “북한의 공식 발표 통해서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는 만큼 인도적 차원에서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silverpap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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