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요원 유출’ 간첩죄 처벌 어렵다?…‘주적=북한’에 갇힌 안보
지난 7월30일 군사기밀누설 등의 혐의로 정보사령부 소속 군무원 ㄱ씨가 구속됐다. 정보사 해외공작부서 소속인 ㄱ씨는 외국에서 신분을 위장하고 첩보활동을 하는 정보사 요원(블랙 요원)의 신상 등을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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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수사기관은 ㄱ씨 개인 노트북에서 중국 동포에게 기밀이 유출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수사 결과 ㄱ씨가 중국 동포에게 기밀을 유출한 게 사실로 드러나도 중국은 ‘적국’이 아니어서 ㄱ씨에게 간첩 혐의는 적용하기 어렵다. 형법상 간첩죄는 국가기밀을 ‘적국’(북한)에 넘겼을 때 적용되기 때문이다. 간첩죄는 형법 98조(간첩)뿐만 아니라 군형법 13조(간첩), 국가보안법 4·5조(목적수행·자진지원)으로도 처벌하는데, 이 또한 북한 관련성이 입증돼야 한다.
지난 2022년 4월 특수전사령부 소속 김아무개 대위가 지난 1년간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이(텔레그램 아이디 ‘보리스’)에게 텔레그램으로 군사기밀을 넘기고 5천만원어치 가상화폐를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김 대위에게는 국가보안법 위반,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1·2심 법원은 김 대위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무죄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을 처벌하려면 김 대위가 기밀을 넘긴 ‘보리스’가 북한 공작원이란 점이 입증돼야 했다. 군 검찰은 보리스를 북한 대남공작부서인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이라고 봤다. 군 검찰은 보리스가 김 대위와 텔레그램으로 대화하면서 “일 없습니다”(괜찮다)와 같은 북한 말투를 자주 사용했고, 이런 말투 때문에 보리스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김 대위가 명확히 인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판결문에서 보리스의 신상이나 국적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직접 증거가 없어 보리스의 북한 연관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일 없습니다” 말투도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봤다. 특전사 김 대위 사건으로 미뤄볼 때 정보사 ㄱ씨에게 간첩 혐의를 적용하려면 ㄱ씨가 직접 북한 지령을 받았거나, 기밀을 건넨 중국 동포가 북한 정보기관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ㄱ씨가 인지하고 있었다고 군 수사기관이 입증해야 한다.
‘적국’이 아닌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등 외국에는 기밀을 넘겨도 간첩죄가 아닌 군사기밀보호법과 형법의 공무상 비밀누설죄 등이 적용된다. 이는 형법의 간첩죄가 적과 우방이 뚜렷이 구분되던 냉전시대에 만들어진 조항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1990년 이후 냉전-탈냉전-신냉전으로 급변하는데, 한국은 여전히 ‘적국’을 위하여 간첩행위를 해야만 간첩죄로 처벌이 가능하다.
해묵은 주적 논란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국민의힘은 각종 선거 때 보수 세력을 결집시키려고 ‘북한=주적’을 단골로 꺼낸다. 대선 때인 지난 2022년 1월14일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페이스북에 ‘주적은 북한’이란 글을 갑자기 올렸다. 지난해 2월 윤석열 정부의 첫 국방백서에서는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란 표현이 6년 만에 부활했다. 문재인 정부는 적을 북한으로 특정하지 않고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고 국방백서에 적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주적’을 명시하거나 ‘북한 정권과 북한군이 우리의 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혀야 대적관이 분명해지고 안보가 튼튼해진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과 달리 국제사회에서 특정 국가를 적으로 공식 표현하는 경우는 한국과 북한을 빼곤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외국은 ‘위협’ 같은 흐릿한 용어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급변하는 현실에 유연하게 대응하려고 한다. 적을 특정하면 전략적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힌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이 ‘북한=주적’이나 ‘북한 정권과 북한군이 우리의 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혀 미래의 한반도 주변국 위협에 대비하는 군사력 건설에 스스로 족쇄를 채울 수도 있다. 한국 국방비 중 무기관련 예산을 보면, 70%는 북한 위협에 대비하고 30%는 중국, 일본 등 한반도 주변의 불확실한 위협에 대비하는데 쓴다.
2018년 1월 공군의 공중급유기가 처음 도입됐다. 이에 앞서 공중급유기 사업 검토 당시 기자들이 “이미 한국 공군력이 북한보다 월등히 우세한데, 왜 1조5천억원을 들여 공중급유기 4대를 외국에서 사와야 하느냐”고 물었다.
당시 군 당국은 이렇게 설명했다. “독도에서 분쟁이 벌어진 상황을 가정할 경우 전투기에 싣고 뜰 수 있는 연료가 제한돼 F-15K는 독도에서 30여분, KF-16은 독도에서 10여분 가량 머물다 공군 기지로 복귀해야 한다. 하늘에서 공중급유기로 전투기에 연료를 급유하면 독도 상공에서 전투기가 1시간 이상 작전을 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방백서에 북한군을 적이라 명시하면 일본이 “한국군의 적이 북한군인데, 왜 전투기 작전반경을 한반도 밖으로 확대하는 공중급유기같은 무기를 마련하느냐. 일본을 겨냥한 것 아니냐”고 반발하는 빌미를 줄 수도 있다. 북한만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간첩죄의 적용범위뿐 아니라 국방력 건설의 기회를 스스로 위축시키는 꼴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19세기 영국 총리를 지낸 헨리 존 템플은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이 영원해야 하고 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 국익을 기준으로 시대와 너무 동떨어진 간첩죄와 주적 논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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