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함 동반 ‘번쩍이는 기지’… 때론 악마의 얼굴로 나타난다[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사회적 관계 도움 주지만
판단력 敵으로 간주되기도
낭만주의 시대에 높은 위상
‘진리의 원천’으로 평가받아
타인 웃음거리 삼을땐 불쾌
슐레겔 “슬픈 재치보다
더 경멸스러운 것은 없다”
편한 자리든 격식이 필요한 자리든, 재치는 사람을 돋보이게 한다. 영리하게 보이고 매력적이게 만든다. 보라. 저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뭔가 재치 있는 농담을 했는지 큰 웃음이 터진다. 모든 사람이 큰 기대감을 담은 얼굴로 그 사람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재치는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어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고, 자유로워진 대화 속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나타날 수 있게 한다. 그러니 재치는 가장 긍정적인 사회적 관계의 설립자다. 그런데 저 대화자들의 다른 한편에는 전혀 말이 없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절묘한 재치 드라이브와 함께 옮겨가는 말의 축구공만 눈으로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 그는 이 축구 경기에 뛰어들길 겁내는 듯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다.
이 가운데 당신의 자리는 어디인가? 물론 대부분 사람이 재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재치 있게 말하지 못하는 쪽에도 관심이 간다. 누군가 그저 둔해서가 아니라, 재치 있는 말이 떠올랐을 때도 그것을 내뱉길 주저한다면, 그 말 속에서 뭔가 위험한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재치는 좋은 것이면서도 악마적인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타인을 웃음거리로 삼는 데서 빛을 발하는 재치.
이렇듯 여러 얼굴을 지닌 재치란 도대체 무엇일까? ‘재치(才致)’는 영어 wit, 독일어 Witz, 프랑스어 esprit에 해당하는 말로 ‘기지’(奇智), ‘재기’(才氣) 등으로도 번역된다. 재치는 오래전부터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서 조명을 받아오기도 했지만, 올바른 판단력의 적(敵)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영국 철학자 로크가 쓴 17세기의 고전 ‘인간지성론’은 재치란 ‘유사성’을 지닌 것들을 조합하는 능력으로서, “공상적인 기분 좋은 광경”(‘인간지성론’, 2권 11장)을 상상력에 선물한다. 학창 시절, ‘자라’라는 별명을 지닌 선생님이 있었다. 이 선생님의 식사하는 모습이 자라와 비슷하다는 것을 ‘재치 있게’ 발견한 학생들이 붙인 것이다. 이 재치의 산물 ‘자라’는 그 모습을 ‘상상’하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진리, 즉 참된 판단(선생님은 인간이다, 자라는 양서류다 등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와 다르게, 재치가 진리의 원천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고 일찍이 없었던 영광을 얻게 된 것은 초기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이다. 초기 낭만주의는 독일 튀링겐주 예나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1800년까지 2년간 나온 잡지 ‘아테네움’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피력한 일군의 사상가, 예술가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그룹의 리더 격 예술이론가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세련된 교양은 조화로운 보편성의 재치이다”(홍사현 역)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시대까지 누리고 있는 재치의 높은 위상에 대한 최초의 확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높은 위상은 재치가 기발한 즐거움을 만들어 낸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재치가 ‘진리의 원천’이라는 데에서 생긴다. 어떻게 재치가 감히 진리의 원천인가? 우리가 살펴본 로크의 시대, 17세기 이래 서구에서 재치는 ‘이질적 요소를 종합’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재치의 이러한 핵심적인 면모를 슐레겔은 이렇게 표현한다. “재치 있는 많은 착상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두 생각이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예기치 않게 다시 만난 것과 같다.” 앞서 예를 들었던 별명은 ‘선생님’과 ‘자라’라는, 외관상 “가까운 관계”지만 ‘이질적인’ 두 요소를 종합한다.
우리 시대의 놀이 문화인 ‘삼행시’ 역시 좋은 예다. 이름 석 자를 가지고 짓는 삼행시가 성공적으로 폭소와 경탄을 자아내는 경우는 그 이름과 관계있다고 전혀 생각지 못한 요소를 그 이름의 세 글자와 결합하는 때다. ‘바밤바 삼행시’ 같은 것을 보라. 모든 길은 바밤바로 통한다거나, 어딜 가든 바밤바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듯 바밤바와 무관한 요소들을 무한히 종합해나간다. 물론 이 종합의 중심에는 바밤바가, 아니 재치가 있다. 요리사에게 요구되는 덕목 가운데 하나가 재치인 것도, 요리의 본질이 이질적 재료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가 재미있는 예를 보여준다. 모스크바 한 호텔 레스토랑의 주방장은 혁명 와중 재료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요리 ‘살팀보카’의 허브 ‘세이지’의 기막힌 대용품을 찾는다. 그것은 최고 미식가만 식별할 수 있는 ‘쐐기풀’이었다. 요리란 조화로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재료들을 ‘신의 한 수’처럼 결합하는 재치의 문제인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이 진리와는 상관없던 재치를 진리의 원천으로 추켜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종합의 힘’ 때문이다. 그 시대 철학의 과제는 바로 종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낭만주의는 독일관념론처럼 칸트 철학을 계승하고 쇄신하는데, 칸트의 과제가 바로 ‘선험적 종합 판단’으로 표현되는 종합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그 과제는 서로 이질적 요소들인 주어와 술어가 결합해서, ‘지식’을 담은 보편타당한 진술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원리를 찾는 것이다. 이후 종합의 과제는 칸트 철학을 넘어서서, 모든 요소를 통일하는, 헤겔의 ‘절대지’와 같은 모습에 이른다. 이와 관련, 현대 철학자 라쿠-라바르트와 낭시는 초기 낭만주의에 대한 연구서 ‘문학적 절대’(홍사현 역)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낭만주의가 물려받아 격상한 그 재치는 헤겔이 ‘절대지’라는 확고한 명칭으로 부르게 될 것과 가장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재치는 바로 칸트적 의미에서 선험적 종합을 나타낸다.”
재치는 수많은 지식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듯’ 포착한다. 지지부진 진행되던 회의 중 누군가 재치 있는 농담 한마디를 해서 모두의 감탄을 이끌어 냈다고 하자. 그 농담은 지지부진한 회의의 이유와 문제점, 회의에서 오간 지식과 아이디어에 대한 평가 등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기에, 즉 회의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감탄을 자아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재치는 그저 한번 웃고 지나가는 가치 없는 농담으로 여겨졌을 것이며 그 농담을 한 사람도 특별한 통찰력을 지닌 자로 평가받을 수 없었으리라. 재치는 유쾌함과 함께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는 힘이다.
그런데 재치가 늘 유쾌함을 동반한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불쾌함과 더불어 악마의 얼굴을 하고서 나타날 수 있다. 좋은 예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나간 한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가족이 수십 년간 모은 400루블의 돈을 들고 누나의 혼수품을 도시에서 사 가지고 와야 했다. 그런데 그는 도시로 가자마자 놀음판에 끼어들어 돈을 순식간에 다 탕진하고서 여관방으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여관에서 술과 요리를 잔뜩 주문해서 먹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경찰이 와서 조사하기 전 자살한 소년의 여관방이 그대로일 때, 사람들은 권총 자살한 사람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대체로 가까운 자의 불행에는 어느 것이든 언제나 제삼자의 눈을 즐겁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법인데…우리네 부인들은 말없이 요모조모 뜯어봤지만 남성 동반자들은 눈에 뜨일 만큼 기지와 드높은 기상을 발휘했다.”(김연경 역) 그야말로 이들은 권총 자살한 소년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재치 또는 지혜, “기지”를 뽐낸다. 소년이 이보다 더 현명할 수는 없었다느니, 짧지만 잘 살다 갔다느니, 자신의 재치랍시고 논평을 내놓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는 “광대 역을 자처하며” 소년이 먹다 남겨놓은 포도송이를 슬쩍했고, 어떤 이는 반쯤 비운 술병을 집어 들어 웃음을 자아냈다. 이런 것이 참된 ‘기지’인가! “슬픈 재치보다 더 경멸스러운 것은 없다”(슐레겔)
‘악령’에 들어있는 이 악마의 작품 같은 이야기는 왜 어떤 사람들은 재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데 소극적인지 알려준다. 재치는 순간적 순발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것은 유사하게 발음되는 단어를 병치한
‘Blitz_Witz(번쩍이는 재치)’라고도 한다. 이 번쩍이는 재치를 뽐내고자 지나치게 욕심을 내다가는 광대 역을 맡는 실수의 나락으로 떨어져 흑역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 재치보다 앞서는 것은 ‘신중함’인 것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초기 낭만주의
초기 낭만주의 사상은 18세기 말∼19세기 초 독일 튀링겐주 예나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아우구스트 슐레겔·프리드리히 슐레겔 형제, 이들의 연인 카롤리네와 도로테아, 그리고 슐라이어마허·노발리스·티크·셸링 등이 초기 낭만주의 그룹에 속한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이 그룹을 주도했다.
이들 가운데 셸링을 제외하곤 1798년부터 1800년까지 발행됐던 잡지 ‘아테네움’에 기고하며 사상을 펼쳤다. 그들의 낭만주의는 고대 그리스 시문학에 대한 문헌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현재의 문학을 비판적으로 쇄신하는 것, 칸트 철학의 창조적 계승 등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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