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한복판에 들어선 범죄자 전용 초호화 행복 빌딩[책과 삶]

백승찬 기자 2024. 8. 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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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도쿄도 동정탑’
범죄자→호모 미세라빌리스, 교도소→심퍼시 타워
말과 정의의 엇갈린 관계 폭로
AI 생성 문장 활용으로도 화제
‘도쿄도 동정탑’으로 제170회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가 구단 리에. 아쿠타가와상은 일본 신진 작가가 쓴 순수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권위있는 상이다. (C)SHINCHOSHA

도쿄도 동정탑

구단 리에 지음 |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184쪽 | 1만5000원

말은 형체가 없지만 때로 바위보다 무겁다. 말이 사람을 살리거나 해칠 수 있는 이유다. 말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말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때 문제가 발생한다. ‘창조’ ‘희망’ ‘평등’ ‘다양성’ ‘공생’ 같은 멋지고 아름다운 말이 누군가에게는 ‘압도적인 파괴’일 수도 있다.

“전성기 시절의 BTS 멤버와 혼동할 만한 꽃미남”인 26세 도조 다쿠토는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일하다 심퍼시 타워 도쿄의 ‘서포터’로 전직했다. 이 타워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도쿄도 동정탑(東京都 同情塔)’이라고 부른다. 심퍼시 타워 도쿄를 그대로 일본어로 옮긴 것이다. 말 사이의 간극이 장편소설 <도쿄도 동정탑> 서사의 동력이다.

소설 배경인 근미래 일본은 실제 역사가 살짝 뒤틀려 제시돼 있다. 2020 도쿄 올림픽을 위한 주경기장 공모전에서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설계가 당선됐다. 그러나 하디드의 안은 예산과 공사기간 문제로 논란 끝에 폐기됐고, 대신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의 안이 채택됐다. 소설에는 하디드의 설계가 그대로 지어진 것으로 나온다. 2020 도쿄 올림픽은 코로나19 창궐로 1년 연기돼 개최됐으나, 소설 속에선 2020년 열렸다가 수많은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암시된다. 일종의 평행세계다.

소설 속 사회학자 마사키 세토는 범죄자를 처벌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면서 ‘호모 미세라빌리스’라는 개념을 내놓는다. 이들은 죄를 짓고 싶어 지은 게 아니라, 지을 수밖에 없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은 반대로 ‘호모 펠릭스’라 불린다. 심퍼시 타워 도쿄는 호모 미세라빌리스를 수용하는 도심 한복판 71층짜리 첨단 시설이다. 전통적 의미에선 ‘교도소’지만, 거주 환경은 더없이 안락하다. 도조의 직업인 ‘서포터’는 옛 ‘교도관’이다. 범죄자를 위해 이렇게 좋은 시설을 제공해도 되는지를 두고 격렬한 찬반 양론이 오간다.

도조보다 한참 연상인 연인 마키나 사라가 심퍼시 타워 도쿄의 설계자다. 마키나는 하디드의 올림픽 주경기장에 대응하는 멋진 타워를 설계한다. 마키나는 건축가란 미래를 보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건축은 도시를 이끌고 미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마키나는 드로잉은 포르노, 건축은 ‘현실의 여자’라는 비유를 든다. “내가 구축한 것 안에 타인이 드나든다는 감각이 제게는 최고로 기분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마키나가 호모 미세라빌리스와 심퍼시 타워의 아이디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선구적·지적인 사람이 고도로 응축된 개념을 아름다운 말로 설명한다. 그 개념의 현실적 구현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도 있지만, 그 개념을 생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도 있다. 마키나는 호모 미세라빌리스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면서도 하디드의 주경기장을 향한 답은 자신이 보여줘야 한다고 믿고 타워 설계를 시작한다. 결국 마키나는 “진심으로 동의하지 않는 프로젝트에 협력”한 대가를 치른다.

범죄자와 호모 미세라빌리스, 교도관과 서포터, 교도소와 심퍼시 타워. 하나의 현상을 두고 다르게 부르는 말이다. 여기에 정식 명칭인 외국어 심퍼시 타워 도쿄와 이를 직관적 일본어로 되돌린 도쿄도 동정탑이란 말도 충돌한다. 애초 말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으나, 차츰 그 기능이 변형됐다. 소설 초반부 심퍼시 타워 도쿄는 ‘바벨탑의 재현’에 비유된다. “저마다 이기적인 감성으로 말을 남용하고 날조하고 확대하고 배제한, 그 당연한 귀결로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입에서 나온 말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독백이 된다. 독백이 세상을 장악한다.”

지난 1월 제17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 당시 <도쿄도 동정탑>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쓴 문장을 일부 수록한 것으로 화제가 됐다. 마키나가 호모 미세라빌리스의 뜻을 묻는 대목, AI에게 ‘자기 의식’이 있는지 묻는 대목 등에서 AI 생성 문장이 활용됐다. AI가 언어로 구축된 세상의 지식을 모아 가치 판단 없이 그럴듯한 문장으로 엮어내는 걸 마키나는 비판적으로 본다. AI를 비판한 시각으로 자신의 작업을 사전점검했으면, 마키나는 지속 가능하고 위대한 건축가가 됐을지 모른다. 작가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으나, <도쿄도 동정탑>은 “허울뿐인 말과 실체 없는 정의의 관계를 폭로”(일본 출판사 신시오샤)한다는 점에서 말과 개념의 정의를 중시하는 ‘PC’(정치적 올바름) 시대에 대한 피로감도 드러낸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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