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진숙이 되지 않으려면 [김명인 칼럼]
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하필 찌는 장마철에 연일 이어지고 있는 이런저런 청문회를 나는 마음먹고 정식으로 시청한 적이 없다. 막장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요즘의 청문회를 정주행하는 분들도 역시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전력이 있는 나로서는 가끔씩 청문회에 관한 엽기적인 후문들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위험 수위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휴대폰만 켜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각종 ‘짤’들이 고맙기까지 하다.
이렇게 건성건성 청문회 정국을 넘어가려고 노력 중이지만 결국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이진숙이라는 인물의 청문회는 그중에서도 단연 엽기적이어서 어쩔 수 없이 자꾸 그 추이를 들여다보게 됐다. 이 청문회의 풍경을 접하면서 이 인물이 방통위원장으로서 야기시킬 게 분명한 공영방송의 위기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그보다도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더 앞섰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986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해서 1990년 걸프전 당시 여성 종군기자로 복무함으로써 유명해졌고 1992년에는 엠비시 총파업에도 참여했으며 2006년에는 워싱턴 특파원이 되었다가 2010년 이명박 정권 시기엔 김재철 사장에게 중용되어 거꾸로 노조 탄압에 앞장섰고 2015년에는 대전엠비시 사장에 취임했다가 2018년 사임한 뒤 자유한국당에 입당하고 2021년 윤석열 대선후보 캠프에서 언론특보, 시민사회총괄본부 대변인까지 지낸 인물. 하지만 그의 이러한 외적 경력사항만으로 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러한 그의 회절의 경력을 문제 삼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두명이겠는가. 그의 광주항쟁이나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에 대한 극우적 입장과 공영방송이 민노총 등 좌파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념은 매우 확고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오도된 확증편향의 소산이라고 하더라도, 그 개인의 정치사회적 신념이라면 존중해 줄 수 있다. 존중해 주고 말 것도 없이 이미 윤석열 정부에는 그런 극우적 신념을 가진 고위 공직자들이 존재한다. 내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한 것은 청문회에서 보여준 그의 특이한 인격적 면모 그 자체에 대해서이다. 주식, 금융 거래 내역 등 기본적인 자료 제출의 거부도 전례 없는 일이지만 대전엠비시 사장 시절의 상식을 넘는 법인카드 사적 유용 사례와 그에 대한 부인 일변도의 황당한 답변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보통은 그런 상황에 이르면 설사 대통령의 임명 강행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다고 하더라도 적당한 변명과 마지못한 사과로 시간을 끌며 유야무야 청문회 일정을 소비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한마디 변명도 사과도 없이 마치 핍박받는 비극적 영웅이나 투사처럼 버텨나간다. 그것도 법인카드 사적 유용이라는 매우 파렴치한 행태를 묻는 장면인데도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인격이 가능할까. 아마도 좌파에 장악된 공영방송을 다시 뺏어오겠다는 극우적인 공적 사명감과 어떻게든 더 높은 권력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사적인 욕망이 상승적으로 뒤엉킨 결과 이런 괴물에 가까운 엽기적인 인격이 주조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그런 인격의 실재를 직접 목도하는 것은 자못 충격이었다.
그러나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런 인격이 비단 이진숙이라는 공직후보자 한 사람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나르시시즘의 고통’이라는 저서에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이후의 인간들은 자기 이외에는 어떤 다른 준거가 없는 유아론적 이상에 집착하는 나르시시즘에 깊이 경도되어 있다고 보았다. 근대세계 자체가 개인의 주체성에 대한 신화에 토대를 두고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가 개인을 거대 이념이나 윤리적 공준, 공동체적 가치 등에서 분리된 고독한 자기경영주체 혹은 소비주체로 환원시켜 자기를 구원할 존재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신종 유아론을 확산시켰다고 할 때 그것을 나르시시즘이라 명명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객관적 권위를 가지는 진리도 없고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윤리도 없는 조건에서 내가 믿는 것이 진리이고 내가 행하는 것이 윤리가 된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이 전도된 탈진실, 탈윤리의 세계에서 이런 나르시시즘은 인간 실존의 보편적 표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진숙이라는 인물의 완악한 얼굴이 나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고독한 나르시시스트의 적개심과 투쟁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어쩌면 그 얼굴은 망가진 얼굴이 아니라 이 막장 같은 시대를 살아남기에 가장 최적화된 상태로 완성된 얼굴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악인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환자의 얼굴이며 나는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중증이든 경증이든 저마다 이렇게 병든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꾸로 아직 모든 사람이 이진숙만큼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 질병의 치유 가능성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이 병든 나르시시즘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기객관화를 할 수 있는 능력 여부에 달려 있다. 이 세계 속에서 자기가 처한 위치가 어디며 자기는 지금 그 위치에 걸맞은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나는 그 의미에 긍정적으로 부합하는 존재인가 하는 물음을 부단히 묻고 점검하는 것, 나는 그것을 자기객관화라고 생각한다. 자기성찰이라고 해도 좋다. 부끄러움이나 염치, 겸손, 배려, 희생 같은 덕목들은 이런 자기객관화와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가능한 덕목들이다. 우리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진숙 같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최소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 자기객관화라는 정신적 단련을 나날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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