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슬기 사례로 또..피해자에만 '엄격한 잣대'[한해선의 X-선]
피해자만 두 번 우는 세상이다.
최근 방송인 박슬기가 '갑질 영화배우'를 폭로하며 정의를 쫓으려다 오히려 역풍을 맞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박슬기를 질책하는 이들은 그에게 가해자의 실명을 밝히지 않을 거면서 뭐하러 얘길 꺼냈냐고 한다. 박슬기는 본의 아니게 논란이 된 이후 그렇게 활발하게 하던 SNS 활동도 며칠째 중단했다. 악플을 피하기 위해 댓글창도 닫았다.
박슬기는 지난 7월 27일 유튜브 채널 'A급 장영란'에 출연해 연예계 활동을 하며 서럽게 당했던 순간을 털어놨다. 그는 "나 영화 찍을 때였다. 내가 '키스 더 라디오'를 하고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 생방송이라 모두에게 공유가 된 상황이었다"라며 "도착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다 같이 햄버거를 먹고 있더라. 근데 나는 나 때문에 촬영이 딜레이 된 게 미안해서 안 먹겠다고 했다"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우리 매니저 오빠는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해서 '오빠라도 먹어라'라고 했다. 그래서 매니저 오빠가 하나 먹었다. 그런데 XXX 오빠가 우리 매니저 오빠의 뺨을 때리더니 '개XX야. 너는 지금 네 배우가 안 먹는데 왜 먹냐'고 소리쳤다"고 밝혀 모두를 경악게 했다. 박슬기는 "'나는 너를 기다렸다' 이런 거 같았다"며 "나한테 못 하니까 매니저한테 한 거 같았다"고 말했다.
박슬기의 충격적인 폭로에 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박슬기가 '키스 더 라디오'에 출연할 당시 참여한 영화 중 '카리스마 탈출기'와 '몽정기 2'가 있다며 주연 배우 안재모와 이지훈을 가해자로 추정했다. 심지어 이지훈이 가해자가 아니냔 추측에는 '햄버거 먹을 때 그랬다는 거 보니, 햄버거 입술이라고 힌트를 준 건가'라고 상상력을 풀 가동한 말까지 나왔다. 이 추측들은 어느새 '카더라'화 됐고, 소문이 기정 사실처럼 되자 안재모와 이지훈이 직접 해명에 나서는 사태까지 번졌다.
이지훈은 "여러분의 추측은 아쉽게 빗나갔다"고 했고, 안재모도 "내 식구(스태프)들에게도 욕을 안 하는데 남의 식구를 때린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라며 의혹을 일축했다. 논란이 커지자 박슬기는 SNS를 통해 "지훈오빠는 저와 몽정기2때 정말 재밌게 촬영했고 지금도 너무 좋아하는 오라버니"라고 해명했다. 박슬기는 쓸데없이 문제를 들췄다는 이유로 욕을 먹고 눈물, 콧물 다 쏟았다고 한다.
지난 주말 벌어진 이 사태는 예상보다 과열상태가 오래갔다. 결국 'A급 장영란' 측은 박슬기의 갑질 배우 폭로 장면을 편집했다. 박슬기가 그 말을 한 의도는 자신의 한풀이도 있겠지만, 업계에 이제는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갑질이 일어나선 안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터다. 박슬기 당사자야말로 악질인 가해자의 이름을 얼마나 밝히고 싶었을까. 하지만 가해자 이름을 밝히는 순간 법적 고소 등 밀려올 후폭풍은 또 오롯이 그의 몫이 된다. 박슬기가 데뷔 20년 만에 정말 드물게 자신의 가장 한스러웠던 사건을 얘기했지만, 돌연 '입 싸고 경솔한 연예인'이란 핀트를 어긋난 프레임이 씌워진 거다.
그간 '똑순이' 이미지에 평판 좋던 박슬기는 이 사건 하나로 욕받이가 됐다. 과거 박슬기 매니저에게 폭력, 폭언을 했던 '진짜 가해자'는 그 뒤로 잘도 숨어있었다. 매일 더 더 자극적인 이슈가 넘쳐나는 연예계라 대중도 더 이상 박슬기가 말한 가해자를 찾는 놀이에는 흥미를 잃었다. 진짜 가해자인 그 배우는 박슬기에게 닥친 일련의 과정을 보며 콧방귀라도 뀌었을까. '그 사건'을 기억조차 못 할지도 모른다.
'책임지지 못할 폭로'가 과연 타당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여전히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문제다. 다만 폭로 내용의 범위를 크게 들여다 볼 필요는 있다. 생각만큼 가해자가 쏙쏙 밝혀지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 '인물'에만 혈안이 되기보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해 보인다. 그래야 '제 2, 제 3의 가해자'가 근절되지 않을까.
기자에게도 가해자의 얼굴을 철저히 가리고 신상을 밝히지 않아야 하는 보도 원칙이 있다. 살인자, 성범죄자처럼 극악무도한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적용된다는 이유에서다. 마우스로 가해자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키보드로 'A씨'란 익명을 쓸 때면 분통이 터진다. 그럼에도 '폭로'와 일맥상통한 '뉴스'가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우리가 악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한해선 기자 hhs422@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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