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2024가 묻는 ‘국기 달고 뛸 자격’ [평범한 이웃, 유럽]
한 달 동안 독일에서 열린 유로 2024(유럽축구선수권대회)가 7월14일 밤(현지 시각) 스페인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결승에서 잉글랜드를 2-1로 물리친 스페인은 이로써 유로 역사상 최다 우승국(4회)이 되었다. 이번 유로 2024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스페인의 떠오르는 스타 라민 야말이 세운 유로 역사상 최연소 출전과 최연소 득점 기록이다. 야말은 2007년 7월13일생으로, 유로 결승 전날 17세가 되었다. 야말의 최연소 득점 기록이 나온 경기는 4강 프랑스전이다. 골을 넣은 야말은 가슴 앞에서 두 손을 교차시키고 손가락으로 숫자 ‘304’를 만들었다. 이 숫자는 라말이 자란 스페인 카탈루냐의 도시 마카로에 위치한 동네 로카폰다(Rocafonda)의 우편번호 ‘08304’를 의미한다.
로카폰다는 1960년대에 일자리를 찾아 스페인 남부에서 카탈루냐로 이주한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처음 거주지로 조성됐다. 1990년대 들어서는 주로 아프리카 출신 이주민이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저소득층과 외국인 이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이주민을 여러 사회문제의 원흉으로 보는 스페인 극우 정당 복스(Vox)는 로카폰다를 일컬어 ‘에스테르콜레로 물티쿨투랄(estercolero multicultural)’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에스테르콜레로’는 농가에서 비료로 쓰기 위해 가축의 분뇨를 모아두는 큰 통을 뜻한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다문화 똥통”이라 지칭한 것이다. 스페인 일간 〈엘 파이스〉는 좀 더 점잖게 “잊혀지고 고립된, 낙인찍힌 동네”라고 로카폰다를 설명했다(7월11일자 보도).
세상의 중심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동네가 회자되는 것은 야말 덕분이다. 야말은 축구화에도 아버지의 출신국인 모로코, 어머니의 출신국인 적도기니의 국기와 더불어 숫자 ‘304’를 새겨넣었고 그의 신발은 유로 2024 경기 중 여러 번 카메라에 잡혔다. 복스가 똥통이라 부른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야말의 의지다. 로카폰다는 이제 “똥통에서 솟아난 희망”의 상징이 되었고, 좌파 정치인들은 복스의 과거 표현을 들춰내 비웃고 있다. 그러나 야말이 득점한 다음 날 복스의 한 정치인(후안 가르시아-갈라르도)은 “스페인 인구의 12.6%를 차지하는 이주민이 스페인에서 일어나는 여성 대상 성범죄의 절반을 저지른다”라고 말하며 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축구와 정치, 분리될 수 있을까
축구 경기장에 야말의 ‘304’ 같은 희망의 제스처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의 경우가 실은 더 흔하다. 유로 2024 조별 리그에서 크로아티아와 알바니아가 맞붙었던 6월19일의 일이다. 크로아티아가 2-1로 앞서던 상황에서 후반전 추가시간이 5분을 막 넘기던 순간 알바니아에서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다. 관중은 물론 선수들도 감정이 격해졌다. 알바니아의 26세 공격수 미를린드 다쿠가 메가폰을 집어들고는 “F*** 마케도니아”, “F*** 세르비아”라고 외쳤다.
상대 팀도 아닌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가 불려나와 저급한 욕설을 받은 배경에는 발칸반도의 복잡한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지점에 삼각형 모양으로 튀어나온 이 반도의 면적은 약 50만㎢다. 한반도의 2.5배쯤 되는 이 땅에 그리스·알바니아·코소보·불가리아·루마니아·몰도바·세르비아·몬테네그로·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북마케도니아가 자리 잡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이 지리적 요충지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고대 로마제국의 첫 침략지로 1000년간 동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나중에는 터키제국이 이곳을 400년 넘게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영토·민족·언어·종교가 복잡하게 얽힐 대로 얽혀 발칸 내부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예를 들어 코소보의 경우 주민의 80% 이상이 알바니아계인데도 세르비아 민족의 성지로 여겨진다. 1389년 터키와의 전쟁을 치르며 세르비아군 10만명이 전사한 장소라는 이유다. 그런 세르비아를 증오하면서 동시에 알바니아는 북마케도니아가 과거 자신들의 땅이며 현재 이 나라 인구의 약 4분의 1이 알바니아계라는 점을 근거로 긴장을 유발한다. 크로아티아는 과거 세르비아가 이끌던 구유고슬라비아에 속하긴 했지만 유고 연방 내 다른 나라들과의 공통점이 적어서 동구권 붕괴 후 독립을 시도했다. 이를 막으려는 유고 연방군이 크로아티아를 공격하면서 유고 내전으로 번졌다.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를 여전히 적으로 대하는 이유 중 하나다.
원래 코소보 출신으로 2023년 국적을 알바니아로 변경한 선수 다쿠는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경기장에서 민족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세르비아와 북마케도니아를 비하했다. 알바니아 팬들이 그의 선동에 호응하자 크로아티아 팬들이 동참했다. “세르비아인들을 죽여라(Kill, kill, kill the Serb)!”라는 수천 명의 외침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축구 시합을 벌이던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 두 나라가 2-2 동점을 만든 뒤 경기장에 있지도 않은 세르비아인들을 죽이라고 외치는 모습은 충격이지만, 유사한 장면이 유럽에서 열리는 각종 국가 대항전에서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세르비아 축구협회는 유럽축구연맹(UEFA)이 알바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처벌하지 않을 경우 유로 2024를 보이콧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UEFA는 다쿠에게 두 경기 출전 금지 처분을 내리고 알바니아 축구 협회에도 “스포츠 이벤트에 부적합한 선동적 메시지 전파”를 이유로 2만5000유로(약 3700만원) 벌금을 부과했다. 이는 이번 유로 조별 리그 단계에서 유사한 여러 명목으로 부과된 벌금 120만 유로(약 18억원)의 일부분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얽힌 게 많은 국가들이 민족의 자부심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유럽의 축구 대회는 스포츠 그 이상의 정치적 이벤트이기도 하다. UEFA가 아무리 축구와 정치를 분리하려 해도 소용없다. 경기장에 대형 국기가 걸리고, 선수와 팬들이 국가를 제창한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명확한 포지션과 임무를 띠고 정해진 규정에 따라, 때로는 반칙도 불사하며 온몸을 던져 합리적 싸움을 하는 것을 보노라면 축구 국가 대항전을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이 그럴듯하다. 과연 축구는 민족 국가 간의 대리전일까. 그렇다면 대표팀 선수들은 모두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 같은 다문화사회에서 애국심이라는 감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자란 축구선수 아크라프 하키미는 소속 대표팀을 정할 때 부모의 출신지 모로코를 선택했다. 스페인 팀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고 문화적으로도 불편했다는 이유다. 스페인에서 나고 자랐으나 알바니아 대표가 된 축구 선수 이반 발리우의 경우는 좀 더 특이하다. 소셜미디어에서 그의 팬들이 ‘발리우’라는 성이 알바니아계인 듯하다는 의문을 제기했고, 알바니아 축구협회가 나서 조사를 벌인 끝에 발리우의 조상이 알바니아인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발리우는 알바니아 국적을 취득한 뒤 유로 2024에서 알바니아 대표팀으로 뛰었다.
하키미는 스페인과 모로코 양쪽의 콜을 받고 문화적 이유로 모로코를 택한 반면, 발리우는 스페인 대표팀에 들기에는 부족했으나 알바니아 대표팀에서는 환영받을 실력이라 축구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위해 알바니아 국적까지 취득했다. 어쨌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유로 2024 결승에서 한 골을 기록해 스페인 승리에 기여한 선수 니코 윌리엄스의 부모는 가나 출신 이주민이다. 가나와 스페인 대표가 다 가능했지만 니코는 스페인을 택했고, 역시 축구선수인 그의 형 이냐키 윌리엄스는 가나를 선택했다.
더 많은 ‘백인’ 선수를 보고 싶으냐고?
국제축구연맹(FIFA)의 자격 규정(eligibility rules)은 선수가 특정 국가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규칙이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국가대표팀을 옮겨 다니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해당 국가의 시민권만 가지고 있으면 그 국가의 대표팀에서 뛰는 것을 FIFA가 허용했기 때문이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쿠벌러 라슬로는 체코슬로바키아(1946~1947년), 헝가리(1948년), 스페인(1953~1961년) 대표팀에서 뛰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축구선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1947년), 콜롬비아(1951~1952년), 스페인(1957~1961년) 대표팀을 거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나 싶지만, 오히려 대표팀을 옮기는 게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규정이 널널했던 면도 있다.
하지만 스포츠가 계속 상업화되고 선수 섭외 경쟁이 치열해지자 일부 국가에서 외국인 선수를 귀화시켜 대표팀에 넣는 행태가 늘어났다. 이것이 스포츠 정신을 훼손한다고 본 FIFA는 2004년 선수가 자신이 소속된 국가와 “확실한 관계”를 입증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구체적으로는 최소한 부모 또는 조부모가 그 나라에서 태어나야 대표팀 자격이 주어졌다. 일단 국가대표로 한 경기라도 뛰었을 경우 다른 국가의 대표가 될 수 없다는 내용도 들어갔다. 하지만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생겨났다. 잠재력이 있어 보이는 선수를 잡아두기 위해 어릴 때 일단 국가대표로 한 경기를 뛰게 한 다음 이후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부르지 않는 방식이었다. 선수 입장에서는 발목만 붙잡힌 채 버려지는 셈이다.
2020년에 개정된 규정은 이를 고려해 21세 이전에 성인 대표팀에서 세 경기 이하로 출전한 경우 등은 대표팀 전환이 가능하도록 했다. 귀화한 선수도 새 나라에서 5년 이상 거주한 경우 그곳의 대표팀에서 뛸 수 있다. 유로 2024에 출전한 24개국 총 622명의 선수 중 이런 조건을 충족한 귀화 선수는 82명으로, 전체 출전 선수의 약 13%에 이른다. 우승국인 스페인 대표팀 선수 중 아이메릭 라포르테와 로뱅 르 노르망이 프랑스 출신의 귀화 선수다.
‘국기 달고 뛸 자격’을 까다롭게 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로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가 인기 있는 것은 관중과 선수가 정체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각국 대표팀이 뛰어난 브라질 선수들로 채워진 월드컵은 상상만 해도 이상하다. 반면 이미 충분히 해당국의 국기를 달 자격이 있는 선수에게 의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것도 그 못지않게 이상하다. 독일 공영방송 ARD는 유로 2024 직전 ‘독일 축구 대표팀에서 더 많은 백인 선수를 보고 싶은가’라는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응답자의 21%가 그렇다고 답했다.
터키 이민 2세 최초로 독일 대표팀 주장이 된 일카이 귄도안은 이 설문에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2024년을 살아가는 ‘진짜 독일 선수’를 피부색으로 식별할 수 있을까. 천문학적 몸값을 지닌 명문 클럽의 선수들도, 그들을 응원하는 관중도, 국가 대항전에서 자신의 뿌리를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다문화사회의 뿌리는 풀기 불가능하게 얽혀 있다.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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