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도 혼자일 수 없다는 순간의 신기루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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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이 교사가 칠판에 써둔 단원명 같다.
주관은 어떻게 객관으로 전개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겠더라고. 지금 생각해도 신통한 건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야."
어디서든 혼자일 수 없다는 순간의 신기루, 신기루가 거듭 전개되면 삶의 진실이 된다는 시적 요강이 '생명력 전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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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 전개
임승유 지음 l 문학동네 l 1만2000원
시집 제목이 교사가 칠판에 써둔 단원명 같다. 고형된 진리랄까, 객관화의 표명이랄까. 시집 안은 퍽 다르다. 한 사건, 한순간의 마음, 찰나의 동태에 대한 주관적 증언으로 유유하다. 미약하고 소소한 마음의 동태들이 어떻게 ‘생명력’으로 ‘전개’될 수 있을까. 주관은 어떻게 객관으로 전개할 수 있을까.
시 ‘직접적인 경험’은 많은 것을 감춰 많은 것을 말한다.
“열흘간 뭘 할 수 있겠어요//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칫솔을 내준 주인과 여름을 보냈다. 비가 오려나봐요 그러면 얼른 뛰어가 빨래를 걷어 오고 오늘은 해가 나려나봐요 그러면 빨래를 내다 널면서//…//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면서 트렁크를 끌고 나올 때 저기 멀리서 손 흔들어주던 주인// 뒷걸음질치며 풍경에서 빠져나온 나는// 이를 닦다가 두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주인이 내준 파란색 칫솔을 가져왔다는 것과 남은 생애 내내 양치질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시엔 기교도 은유랄 것도 없다. 되레 진부해 보이는 경험. 화자는 어떤 이유로 여름철 한 공간을 다녀간다. 열흘 하릴없어, 풍경 몇 컷만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여생에 파급될 것을 자각한다. 그때 한마디, 음식, 그때 온도가 웅크린 자에게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어” 생각하게 한다, 비로소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인다. 보니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질 않던가.
“한 사람을 움직인 건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겠더라고. 지금 생각해도 신통한 건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야….”
서로 다른 두 편의 시 풍경이다. 어디서든 혼자일 수 없다는 순간의 신기루, 신기루가 거듭 전개되면 삶의 진실이 된다는 시적 요강이 ‘생명력 전개’다. 과장 없는 과장을 함께 거쳐 맨 나중 시 ‘음복’에 닿으면 어떨까 한다.
문제는 평생의 상처와 자책도 한순간에서 발단한다는 것이다. 임승유 시인이 4년 만에 내놓은 이 시집엔 ‘엄마’가 상징적이다. 필요할 때 부재한 존재(‘나오는 사람들’), 서늘하고 고집스런 존재(‘늙은 오이 속 파내기’), 야박하고 모진 존재(‘양육’). 엄마는 평소 생색내며 땋아주던 딸의 머리채를 잡고 집으로 질질 끌고 간다(‘감자 껍질 까기’). “너는 정말 너밖에 모르는구나.”(‘정오’), ”너는 도대체 뭐하는 애니?”(‘나오는 사람들’)는 누가 한 말일까. “엄마”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걸까”(‘제라늄의 도움을 받아’).
시인은 비로소 ‘엄마 없던 세계’의 사건과 순간과 마음을 기억하고 발화한다. 엄마와의 다른 세계도 열어 보일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엄마 없는 세계’는 ‘엄마의 엄마 없는 세계’를, 마침내 ‘엄마로서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 엄마와 나는 들판에 앉아 청주를 마신다. …다음에도 두부면 무난하겠어요. 두부를 다 건져 먹고 남은 물은 들판 끝으로 걸어가서 버린다. 엄마도 이쪽으로 걸어오려 한다. 엄마가 한 손으로 들판을 짚으며 일어나는데도 들판은 따라 일어서려 한다. 들판이 기우뚱했지만 들판 같은 건 언제든지 일어나려 하다가도 거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 버릇한다는 걸 엄마도 나도 의심하지 않았다. 많이 늙었겠지요? 벌써 삼십 년이 지났으니. 회고적 심정이었는데. 왜 다들 그러잖니. 이쪽에서 몇 년이 저쪽에서는 하루에 불과하다고. (…)”(‘음복’ 중)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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