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같은 문장에서 만난 연결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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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피, 난 엄마 닮고 싶지 않다고 바라왔는데, 닮은 것 같아요. 중독에 취약해요. 술도 담배도 섹스도 다 끊지 못해요." "언니, 저도 엄마를 닮았어요. 인정하면 나아지더라고요." "저는 미친년이에요. 다 망칠까 두려워요." "언니 미친년 맞아요. 저도 미친년이고요. 망쳐도 괜찮아요. 언니의 슬픔을 사랑해요."
'난 내 허기를 채우지 못했어요. 슬픈 건 허기일까요, 불가능을 알면서 채우려는 헛발질일까요?' 묻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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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무 슬픔
사적인 에세이들
멀리사 브로더 지음, 김지현 옮김 l 플레이타임(2018)
“가피, 난 엄마 닮고 싶지 않다고 바라왔는데, 닮은 것 같아요. 중독에 취약해요. 술도 담배도 섹스도 다 끊지 못해요.” “언니, 저도 엄마를 닮았어요. 인정하면 나아지더라고요.” “저는 미친년이에요. 다 망칠까 두려워요.” “언니 미친년 맞아요. 저도 미친년이고요. 망쳐도 괜찮아요. 언니의 슬픔을 사랑해요.”
내 복잡한 생각 타래를 가위로 싹둑 조각내는 ‘가피’의 말에 기대 울음을 그친 밤이 많았다. 곧 마흔. 집필/강연 노동자, 반려견 보호자, 그 외 등등. 누군가에게 나는 비교적 안정된 프리랜서로 읽힌다. 독자에게는 단단한 사람으로, 강연으로 만난 동료에겐 다정한 사람으로 읽히기도 한다. 나에게 나는 여전히, 영원히 성가신 존재다. 허기지고 충동적이며 중독에 취약한 인간. 이런 내가 글을 쓰고, 수업을 이끄는 게 맞나 오래 고민해 왔다. 아픈 사람이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면서, 정작 나에게는 그 말을 적용하기 어렵다.
최근 수업 네 개의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첫 만남의 핵심은 ‘이곳’에서는 내면의 속살을 꺼내도 안전한 공간이라는 믿음을 갖는 일. 수업에서 ‘그날 나는 슬펐다’를 주제로 3분 글쓰기를 제안했다. 인원수만큼의 슬픔이 공간을 채웠다. 밥 한 끼도 눈치 보며 먹었던 시집살이 서러움, 마음 쏟은 상대의 무심으로 받은 상처,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길을 떠올릴 때의 그리움. 미소 지으며 ‘반갑습니다’ 인사하던 모두가 글을 쓰고 낭독할 때는 웃지 않았다. 울먹였고, 분노했고, 무표정했다. 미소가 사라진 자리에 침묵이 있었고, 그 뒤에 웃음이 흘렀다. 당신도 괜찮지 않았군요? 나란히 모인 슬픔에서만 흐를 수 있는 웃음이 있다.
우리 안에는 슬픔이 있다. 억눌린 슬픔은 잠시 몸집을 숨기고 있다. ‘만족하라, 행복하라’는 사회의 명령에 질려 하면서도, 막상 슬픔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렵다. 부정하고 싶고, 잊고 싶고, 차라리 취하고 싶다. 괜찮다고 믿다가 창밖이 어둑해질 때면 그것이 튀어나올 것 같다. 그것은 허기일 수도, 불안일 수도, 눈물일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멀리사 브로더의 ‘오늘 너무 슬픔’을 찾았다. 책의 저자는 나와 가피처럼 미쳐 있다. 자본주의, 건강 중심주의, 일대일 이성애 중심주의, 행복 이데올로기에 적응하지 않는(못하는) 저자는 책의 처음을 이렇게 시작한다. “아기를 본인 동의도 없이 낳아 버리는 것은 비윤리적인 일 같다. 자궁을 떠나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그는 섭식장애, 성폭력, 끝없는 성적 욕망과 온갖 중독들, 망한 연애와 상실감과 중독과 슬픔을 휘청이며 들려준다. ‘난 내 허기를 채우지 못했어요. 슬픈 건 허기일까요, 불가능을 알면서 채우려는 헛발질일까요?’ 묻는 것만 같다. 첫 문장의 기세처럼, 그녀는 최대한 덜 정제하며 엉망을 드러낸다. 누군가에게 이 책은 악몽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몸부림치는 문장이 필요한 날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익숙한 미소를 지우고 비로소 슬퍼하기 위해. 저자는 눈물처럼 푸른 글자로 채워진 책을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당신이 내 ‘씨발 이게 뭐야’스러운 상황에 공감하고, 당신의 상황에 대해서도 마음이 조금 편해질 수 있기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내가 아직 지구상에 발 딛고 있는 동안-어쩌면 이 지구를 떠난 뒤에도-당신과 깊고 진실한 차원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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