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겹의 철갑(鐵甲)을 두른 얼굴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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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측천무후가 다스리던 시절 재상 누사덕(婁師德)에게 똑똑한 동생이 있었다.
동생은 이에 "형님, 누가 찾아와 제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그냥 닦고 말겠습니다" 하고 말을 한 뒤 괜찮은 답을 했노라고 흡족해하고 있는데, 누사덕이 기다렸다는 듯 그 답을 냉큼 고친다.
남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닦지 않고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자와 얼굴에 열 겹의 철갑을 두른 자는 한갓 오래된 옛날이야기로만 알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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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측천무후가 다스리던 시절 재상 누사덕(婁師德)에게 똑똑한 동생이 있었다. 대주(代州) 자사로 발령이 나자 동생은 하직 인사차 형을 찾아왔다. 자사로서의 자세에 대해 묻는 동생에게 누사덕은 일을 할 때 모름지기 인내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동생은 이에 “형님, 누가 찾아와 제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그냥 닦고 말겠습니다” 하고 말을 한 뒤 괜찮은 답을 했노라고 흡족해하고 있는데, 누사덕이 기다렸다는 듯 그 답을 냉큼 고친다. “아니야, 닦으면 뱉은 사람을 노여워하게 만들 것이 될 것이니, 마를 때까지 그냥 두거라!” ‘신당서(新唐書)’ ‘누사덕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누사덕의 말은 모욕을 참는 힘을 기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그게 아니다. 그는 어떤 모욕도 그저 참으라고 했을 뿐이다.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조건 참는 것이 누사덕의 처세관이었을 것이고, 그 처세관이 그를 측천무후 아래서 출세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뒷날 누사덕의 처세관이 수치심 없는 인간들의 자기합리화에 좋은 밑천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역시 당나라 때 이야기다. 현종 시기는 유례가 없는 태평한 시대였다. 그 시대 별별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아 왕인유(王仁裕)는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란 책을 썼다. 그중에서 양광원(楊光遠)이란 자의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양광원은 과거에 합격한 진사(進士)였으니, 나름 똑똑하고 잘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이란 여기저기서 허풍을 치고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사람으로 해서는 안 될 일도 꺼리고 피하는 법이 없었다. 날마다 왕가의 친족들을 쫓아다니며 알랑거렸고, 권세가를 찾아가 청질을 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언제나 흡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으며 비방하는 말을 쏟아내었다.
어느 날 한 권세가가 양광원의 비루한 짓거리가 보기 싫어 여러 사람이 보는 데서 매질을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단단히 창피를 당한 것이었지만, 양광원은 자기 처신을 돌아보지도 바꾸지도 않았고, 후회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구동성 쏘아붙였다. “낯짝이 두껍기가 열 겹의 철갑을 두른 것 같구만!” 양광원은 한 점의 수치심도 없는 인간으로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남이 얼굴에 침을 뱉어도 닦지 않고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자와 얼굴에 열 겹의 철갑을 두른 자는 한갓 오래된 옛날이야기로만 알고 살았다. 듣고 한번 웃으면 그만인 줄로 알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최근 국회 청문회에서 그런 인간(들)이 실재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세상에나! 열 겹의 철갑 뒤에는 당연히 관작(官爵)을 얻기 위해 권력자에게 빌붙고 아첨을 떠는 맨얼굴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리느라 열 겹의 철갑을 쓴 것일 터이다.
맹자는 ‘수치심은 사람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것이다’(恥之於人大矣)라고 하였다. 이 말에 주희(朱熹)는 ‘수치심을 보존하면 성현이 될 터이고, 수치심을 잃으면 짐승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수치심은 관계되는 바가 중대하다’라는 해설을 달았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살고 싶다. 제발 수치심을 찾고 사람이 되기 바란다. 양광원이 되기 싫다면 말이다.
강명관/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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