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빛이 맺혀요"...양평에 정착한 부부가 10년을 기다려 지은 집 [집 공간 사람]
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바쁜 도시 생활을 돌아보면 가장 잘 누리지 못하는 것이 '집'이다. 자연의 기운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는 마당이 집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다. 한 줌 공기를 들이켤 수 있는 베란다와 테라스마저 사라지면서 집에서 자연을 느끼며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시간은 도시인에게 아득한 노스탤지어가 됐다. 자녀 셋을 키우며 수십 년을 도시 한복판 아파트에서 살았던 고석중(62) 박미아(59) 부부도 그랬다. 인생의 황혼으로 접어들며 자연 속에서 익어가는 인생의 맛을 느끼고 싶었던 부부는 10년 전 결단을 내렸다. 노후에는 집 한 채 지어 자연에 당도하자고.
누구보다 전원생활을 원했지만 부부는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남의 집에 살아보면서 속도를 늦추기로 했다. 5년 동안 발품을 팔아 점찍어 뒀던 경기 양평 문호리에 전셋집을 얻었다. 주택에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생활을 2년 가까이 하고 나니 전원주택살이에 대한 두려움이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돌다리를 몇 번씩 두들겨보고 난 뒤에 결정하는 스타일이에요. 상상만 했던 주택 생활을 실제로 해보니 명확해지더군요. 전원주택이 우리에게 맞다는 걸요. 그제야 땅을 사고 본격적인 집 짓기에 나섰죠."(고석중)
집 설계자를 찾는 과정도 비슷했다. 부부가 이사할 무렵 같은 동네에 짓기 시작한 주택이 눈에 들어와 설계자를 역으로 수소문했다. 이후 건축 과정을 지켜보면서 설계자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그제야 사무실로 찾아가 설계를 부탁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부부의 낙점을 받은 건축가는 이병호 건축사사무소 '오롯' 소장이었다. 이 소장의 진두지휘로 설계 7개월, 시공 8개월을 거쳐 완성된 집이 '문호33'(대지면적 744㎡, 연면적 382㎡)이다.
마음이 편안한 집 짓기
이 소장은 대지의 조건을 점검한 뒤 현대 건축에 한옥 요소를 접목한 디자인을 제안했다. 대지 특성상 남쪽에 산이 있어 시야가 막혀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북서쪽의 열린 조망을 최대한 활용하되, 각양각색의 주택이 밀집한 주변 풍경을 가리기 위해 집을 올려 짓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산에서 완만하게 이어지는 1층에 지하 공간을 마련하고 마당을 위로 올려 'ㄱ' 자 한옥 구조로 건물을 앉히는 방식. 건물의 방향은 과감하게 북서향으로 틀었다. "보통 남향 집을 선호하지만 이 집은 남쪽을 등졌을 때 누릴 수 있는 장점이 많아서 조심스럽게 제안했죠. 1층을 지하처럼 사용하면서 높은 마당을 누리고, 마당 가장 안쪽에 집을 배치해 외부 시선을 차단하면서 정면에 펼쳐진 산세를 조망하도록 했습니다."
1층 정문으로 들어가 그늘진 계단을 오르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고 나지막이 자리 잡은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인다. 두 개의 큰 덩어리가 'ㄱ' 자 모양으로 연결됐는데 마당에서는 정면에 주방과 다이닝룸이 있는 2층 건물이, 그 옆으로는 부부가 사용하는 안방과 욕실이 배치됐다. 건물과 마당 사이에는 낮은 단을 둬 건물의 수평선이 편안한 느낌으로 흐른다. 벽돌 건물은 쌓기 방식을 다르게 해 곳곳에 변주를 줬지만 이 역시 담담한 톤 앤 매너다. "가장 좋은 집은 편안한 집"이라는 이 소장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다. 이어지는 이 소장의 설명. "콘크리트조의 현대 주택이면서도 한옥의 무드가 느껴지는 것이 포인트예요. 이 집의 단초인 편안한 분위기가 한국인의 세포에 새겨진 오랜 기억, 경험과 연결될 수 있었으면 했죠."
집과 마당, 풍경의 동거
내부로 들어가면 상상했던 그대로의 풍경이 펼쳐진다. 1층은 부엌, 다이닝 공간과 거실을 가로지르는 열린 공간이 중심을 잡는다. 부부의 주요 생활 무대다. 이 소장은 "집에서 가장 좋은 뷰를 즐기도록 담장과 난간의 높이와 간격을 세심하게 조율했다"며 "집이 북서향을 바라보고 있어 오랜시간 편안하게 풍경을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1층엔 부부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실과 부엌, 안방을 배치했고, 2층에는 게스트 룸을 올렸다. 그 덕분에 2층집이지만 평소에는 단층집처럼 생활이 가능하다.
2층에선 높은 대지 위에 올라선 장점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방마다 긴 창을 둬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 들어오고, 넓은 외부 테라스에는 멀리 고래산과 북한강이 보이는 시원한 전망이 펼쳐진다. 3개의 방은 복도로 조르르 연결됐는데,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마음이 숨어있다. 세 아이가 집에 찾아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방을 3개 만들었는데, 하나는 가변형 방으로 만들어 평소엔 거실로 사용한다. 문을 닫으면 방이 되고 열면 작은 거실이 되는 한옥의 대청마루가 연상되는 공간이다. "주말마다 아이들이 찾아오는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도시에서 바쁜 일상에 치일수록 무던하고 조용한 배경처럼 존재하는 그런 집이 필요하죠. 세 아이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편하게 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집 짓기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박미아)
매일 편안한 풍경에 안겨
도시의 아파트를 떠나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이 1년 6개월 전.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변하는 집에서 사계절을 지나는 동안 많은 이야기가 쌓였다. 서향 집이라 오후 내내 풍성한 볕이 드리우는데, 안마당과 바깥 마당을 오가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마당으로 나가 벤치에만 앉아있어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든다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에요. 하는 것 없이 자연의 흐름을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채워지거든요. 하루의 변화, 계절의 변화를 잘 느끼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죠. 집 구석구석에 맺히는 빛을 관찰하는 게 새로운 일과가 됐어요." 끝없이 이어지는 남편의 말을 아내가 이었다. "정원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가꾸고 있어요. 변하는 자연이 주인공이니까요. 다음 주엔 아이를 출산한 딸 식구가 들어와서 지내기로 했어요. 곧 있으면 수국이 정말 아름답게 피는데, 올해는 더 특별한 풍경이 되겠네요."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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