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여전히 역사 교과서는 철 지난 이념에 사로잡혔다”

2024. 8. 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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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교과서 자료 사진. /연합뉴스

지난 5월 임기를 시작한 허동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한국현대사 전공자 중에서도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이 되기 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있으면서 연구서 ‘역사관과 역사학자’(북코리아)를 냈는데 여기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한 시대의 지배적 정신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중략) 민족과 민중 같은 거대담론이 횡행할 때 개인은 없다.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자신들이 상상하는 세상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개인 동원을 위한 거대담론의 수사(修辭)인 민족과 민중은 일란성 쌍둥이다.”

당시 그와 이런 내용의 인터뷰를 했습니다. 2022년 9월이었습니다. 이때는 교육부가 공개한 ‘2022 개정 교육과정 시안 고등학교 한국사’에서 ‘북한군의 남침’이란 표현을 빼고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뺀 것이 본지를 통해 보도돼 물의를 빚고 있던 때였습니다. 허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침’ ‘자유민주주의’가 사라진 것도 문제지만, 역사 교과서 집필 교수들이 철 지난 좌파 수정주의(revisionism)를 고집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다음은 일문일답입니다.

'역사관과 역사학자' 저서 낸 허동현 경희대 교수가 2022년 9월 8일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덕훈 기자

―수정주의 사관이 왜 문제인가?

“종래 미국의 정통 사관은 베트남전 등의 미국 참전 이유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봤지만, 위스콘신대의 좌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수정주의는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다르게 해석했다. 이들은 6·25 전쟁을 베트남전의 원형으로 삼았고, 미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한반도에선 계급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봤다.”

―그렇다면 6·25전쟁의 성격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북한의 ‘정당한 민족 해방 전쟁’이 되는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한 수정주의 학자의 영향을 받은 한국 학자들이 교과서의 서술 구조를 바꿔버렸다. 문제는 1990년대 구소련 비밀 문서들이 공개된 이후 6·25가 스탈린의 지령에 의한 침략전이란 사실이 밝혀졌고 수정주의가 빛을 잃었는데도, 교과서 집필자들은 여전히 수정주의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교과서의 대표 필자인 50~60대 학자들은 1980년대에 이 같은 수정주의 사관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전 교과서를 쓰던 민족주의 성향 학자들과는 선을 긋는 ‘민족·민중주의’ 성향을 지니게 됐고, 현재 30~40대 학자들도 여전히 그 영향하에 있다고 허 교수는 설명했습니다.

―그 기조가 교과서엔 어떻게 나타났나?

“1차 세계대전 직후의 서술부터 문제다. 미국을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 봐 침략성을 부각하고 민족자결주의를 깎아내린 반면, 공산 혁명으로 새로 들어선 소련은 약소 민족의 해방을 지원하는 나라인 것처럼 서술했다.”

―소련을 우호적으로 서술했다는 건가?

“당시 소련의 의도가 약소 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계급혁명에 있었다는 것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독일·일본 같은 ‘백색 전체주의’만 비판할 뿐 소련의 ‘적색 전체주의’에는 눈을 감고 있다.”

―1945년 광복 이후의 서술은 어떻게 봐야 하나?

“소련의 공세적 팽창 정책이 냉전의 핵심적 요인이었다는 최근 학계의 통설과는 달리 냉전의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소련은 1945년 9월 런던 외무장관 회의에서 일본과 지중해 진출이 좌절되자 북한에 정권 수립 지시를 내려 분단이 고착화된 것이지만 교과서는 이를 외면했다.”

천재교육 교과서 등 검정을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들의 좌편향 서술 문제점을 분석한 조선일보 2013년 9월 23일 조선일보 기사.

―교과서는 당시 국면에서 ‘통일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좋은 말 같지만, 바꿔 말해 38선 이남에서 세워진 대한민국은 ‘생겨서는 안 될 나라’라는 의미다.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이 북한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소련의 정치 공작이었다는 사실을 서술하지 않아 대한민국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이런 큰 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나 ‘남침’은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교과서 집필자들의 역사관이 문제인 것인가?

“세계가 바뀌었는데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오래전에 서재에 꽂은 책 속의 내용을 여전히 진리로 믿는 19세기 말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역사란 미래 세대에게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살고 죽을 것이냐를 가르치는 과목인데, 정작 제시된 것은 좌파 수정주의인 셈이다.”

지난해 8월 육사에 있던 홍범도의 흉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조치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홍범도가 독립 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에 흉상이 있다는 것은 ‘장차 이 사람처럼 되라’는 의미다. 그것을 보는 육사 생도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공산주의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주적(主敵)으로 삼아야 할 사람들이다.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다고는 해도, 만년에 친소(親蘇) 공산주의자가 된 홍범도를 과연 본보기로 육사 생도들이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가?”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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