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은메달 아니라 ‘화이트골드’

이정구 기자 2024. 8. 1.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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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파리 올림픽에서 헝가리를 꺾은 남자 펜싱 대표팀의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을 보고 8년 전 리우 올림픽의 ‘할 수 있다’ 펜싱 경기가 떠올랐다. 15점을 채우면 이기는 에페 종목에서 10-14로 지던 스물한 살 박상영은 벼랑 끝에서 연속 5점을 따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기적 같은 금메달에 환호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고개 숙인 패자가 더 생각났다.

승자의 기적이 극적일수록 패자의 불운은 더 짙어 보였다. 당시 42살이었던 헝가리 출신 임레 게저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개인전 동메달, 2004 아테네 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5년 세계선수권 개인전 금메달 등 수차례 메달을 따냈던 베테랑이었다. 사실상 은퇴전에서 역사에 남을 대역전극의 패자가 됐다.

인생은 더 얄궂다. 그의 아내 베아트릭스 쾨케니는 2000 시드니 올림픽 여자핸드볼 은메달리스트다. 2002년생 아들 임레 벤체는 이번 파리 올림픽에 헝가리 핸드볼 국가대표로 출전했는데, 31일 조별 예선 노르웨이 경기에서 종료 5초 전 결정적인 슛을 놓쳤고 팀은 곧바로 역전 골을 허용해 1점 차 패배를 당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이 비슷하게 따라가는 걸까.

이번 올림픽에서도 임레 게저가 떠오르는 아쉬운, 불운 같은 은메달이 여럿 나왔다. 한국 하계 올림픽 100번째 금메달이 나온 사격 여자 10m 공기소총 결선, 중국 황위팅은 마지막 1발로 승부가 나뉘는 슛 오프에서 0.1점 차로 은메달을 땄다. 양궁 남자 단체전에서도 프랑스 대표팀은 결승 60점 만점 3개 세트에서 57점, 58점, 56점 고득점했지만, 57점, 59점, 59점을 쏜 한국에 졌다.

4년마다 올림픽이 돌아오면 ‘동메달이 은메달보다 행복하다’ ‘은메달과 동메달 행복감은 별 차이 없다’ 같은 심리학 연구 이야기도 자주 등장한다. 세계 1~3위의 행복감을 논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정상 한 발짝 앞에서 멈춰선 2인자의 안타까운 감정에 많은 사람이 더 공감하는 건 사실 같다.

역사에 남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가 된 임레 게저는 자서전을 냈다. 모두 예상할 수 있듯이 이야기는 그날 결승전 경기 그리고 은메달의 트라우마로 시작된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패배의 순간은 아들과 추억으로 이어진다. 결승전 패배 몇 시간 뒤 아들은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나의 롤 모델이자 챔피언’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자서전 제목은 ‘화이트 골드’다. 트라우마였던 그날이 오히려 은메달에서 화이트 골드로 빛나는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올림픽 무대든 작은 동네 시합이든, 취업 경쟁이든 누구나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좌절할 수 있다. 동정을 받을 수도, 가엾게 여겨질 수도 있다. 게저 부부는 ‘불운한 스포츠 커플’로도 자주 언급됐다. 그때마다 아내 쾨케니는 자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만큼만 불운(unlucky)했으면 좋겠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은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못지않게 밝게 빛나는 은메달과 동메달, 그리고 어디서든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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