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난 사람]“사교육업체에 해킹된 수능, 기괴한 퍼즐놀이로 변질”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2024. 8. 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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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해킹’ 책 펴낸 문호진-단요 씨
헤겔 미학 초고난도 문항 정답률 45%… 평가원은 퍼즐식 문항으로 ‘줄세우기’
사교육업체는 테크닉 가르쳐 돈벌이… “킬러 문항, 개인 일탈 아닌 구조 문제”
“수험생 학부모 불안 줄일 정책 내야”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에는 독일 철학자 헤겔의 미학을 다룬 지문이 출제됐는데 ‘역대급 난도’라는 평가에도 수험생 45%가 정답을 맞혔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국어 영역에는 독일 철학자 헤겔의 미학과 변증법을 다룬 지문이 등장했다. 철학 전공자도 고개를 흔들 정도로 어려운 내용으로 킬러(초고난도) 문항의 전형적 사례로 거론되지만 의외로 수험생 절반에 가까운 45%가 정답을 맞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2023학년도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두 학생은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부 비법을 설명하다 “책을 안 읽는다” “책을 안 좋아한다”고 했다. 1994년도에 처음 도입된 수능의 취지가 ‘암기식 교육 대신 독서와 토론을 통한 사고능력 향상’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깊이 있는 독서가 중요하다’던 수능은 어디로 간 걸까.

최근 출간된 504쪽짜리 책 ‘수능 해킹’은 이처럼 어느새 도입 취지와 전혀 달라진 수능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고발한다. 또 기괴한 퍼즐놀이로 바뀐 수능을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능을 100여 일 앞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두 저자를 만나 수능의 현실과 개선 방안에 대해 들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문호진 씨(오른쪽)와 단요 씨는 “최근 수능은 사교육 업체에서 배운 테크닉을 활용해 퍼즐식 문항을 푸는 방식으로 변질됐다”며 “이는 반교육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소설가인 단요 씨는 실명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고 있어 이번에 문 씨와 함께 펴낸 ‘수능 해킹’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한결 기자 always@donga.com
사교육 시장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봤던 현직 의사 문호진 씨(34)와 소설가 단요 씨는 헤겔의 미학이 거론된 2022학년도 국어 문제의 경우 “핵심 개념을 몰라도, 지문을 이해하지 못해도 풀 수 있다”고 단언했다. 낱말카드를 맞추는 것처럼 지문과 문제의 중복 키워드를 찾아내 매칭하는 일명 ‘눈알굴리기’ 기법을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2023학년도 국어 영역에서 킬러 문항으로 꼽힌 기초대사량 지문의 경우 “숙달된 학생은 레고 블록을 갈아 끼우듯 서술어를 바꾸는 ‘치환 테크닉’으로 1분 30초∼3분 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했다. 국어 영역 외 다른 영역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저자는 이 같은 퍼즐 맞추기식 문항이 “반교육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단요 씨는 “과학탐구의 경우 생명과학1은 논리 퍼즐이, 화학1은 빠른 사칙연산과 미지수 찾기가 관건”이라며 “이는 다른 곳에서 활용할 수 없는 기예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했다. 또 “‘4974와 23134를 곱하시오’라는 문제는 어렵지만 초등학교 수준의 지식만 있으면 된다. 이처럼 형식적 복잡성만 가진 퍼즐식 문항이 지식과 논리의 깊이가 필요한 고난도 문항처럼 오해되며 수능의 문제를 가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왜 수능에 퍼즐식 문항을 내게 됐을까. 문 씨는 “최근 시험 과목 수와 교과 범위가 줄어드는 반면 사교육 업체의 서비스 질은 높아지는 상황에서 평가원이 수험생들을 줄 세우기 위해 택한 게 퍼즐식 문항”이라고 분석했다.

의도가 나쁘지 않았다는 건 저자들도 인정한다. 정부는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며 2000년대 중반 EBS 교재와 수능을 연계했고 2011학년도부터 연계율을 70%로 강화했다. 또 같은 이유로 4과목씩 선택해 시험을 보던 수능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을 2014학년도부터 2과목만 선택해 보도록 했다. 2018년도부터는 영어 영역을 절대평가로 만들었고, 이른바 ‘조국 사태’ 후에는 ‘아빠 찬스를 막겠다’며 정시를 강화했다.

문제는 시험 과목 수와 교과 범위가 줄면서 수험생들이 제한된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게 됐다는 것이다. 문 씨는 “일례로 과거 4과목 시험을 치른 후 2, 3과목만 반영하던 탐구 영역이 ‘2과목 시험 후 2과목 모두 반영’으로 바뀌면서 ‘한 과목이라도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상위권 수험생들이 필사적으로 각 과목에 매달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원이 집중되는 영역을 알게 된 사교육 업체는 평가원의 출제 경향을 패턴화한 사설모의고사로 테크닉을 가르쳤고, 평가원은 줄 세우기를 위해 복잡도를 강화한 퍼즐식 문항으로 대응하며 점차 난도가 높아졌다. 단요 씨는 “갈수록 의미 없는 복잡도만 높이는 식으로 진화해 생명과학의 경우 현재 학원 강사도 ‘특정 유형 문제는 포기하라’고 할 정도로 극한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퍼즐식 문항을 평가원만의 책임으로 돌릴 순 없다. 1998년 설립된 평가원은 역대 원장 11명 중 3명만 임기를 채웠고, 나머지는 문제 오류나 난이도 조절 실패 등에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했다. 그러다 보니 문제를 출제하며 교육적 효과보다 난이도 조절에 더 신경쓰게 됐고,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제출해 논란을 부르기보다 기존 유형에 퍼즐형을 가미해 난이도를 컨트롤하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문 씨는 “평가원이 난이도 조절이나 복수정답 막기 등에만 치중하는 대신 교육적 목적에 충실할 수 있도록 국민과 교육 당국, 언론이 돕기만 했어도 현재 같은 극단적 문항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른바 ‘수능의 퍼즐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같은 변화는 2010년 전후부터 수년에 걸쳐 이뤄졌지만 그동안 거의 공론화되지 못했다. 수험생과 학부모 모두 일단 입시를 거치고 나면 관심이 줄어드는 데다, 교육부 공무원과 교육 전문가도 문항의 세부 변화까진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뒤늦게 초고난도 문항에 대해 알게 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제외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렸고 이른바 ‘사교육 카르텔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 검경까지 동원했음에도 성과는 거의 없었다. 저자들은 “지난해 최고치를 경신한 사교육비도 당분간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단요 씨는 “현 정부는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보다 적을 만들어 대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사실 사교육의 문제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고 설명했다. 문 씨도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있는데 일부만 잘라낸다고 해결될 수 있나. 오히려 불안감만 더 키웠다”고 했다.

저자들은 교육부에 대해서도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면피성으로만 대처하며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단요 씨는 “킬러 문항을 없앴다고 하지만 6월 모의평가의 경우 영어 영역 1등급 비율이 1.47%로 역대 최저였다”며 “이는 절대평가의 탈을 쓴 상대평가이며 과거의 영어 영역으로 회귀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

저자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 역시 사교육을 자극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문 씨는 “의대 증원이 의사 배출로 이뤄지려면 6∼10년 걸리는 반면 사교육 유발 효과는 즉각 발생한다”며 “아동학대라고 부를 수 있는 초등의대반, 자퇴한 N수생을 위한 입시학원, N수생이 빠져나간 자리를 노리는 편입학원 등으로 연쇄반응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봤다.

제목은 ‘수능 해킹’이지만 저자들은 암기형 문항으로 산출되는 내신 성적, 고교생 수준을 뛰어넘는 수행평가를 요구하는 교사들, 사교육 없이 불가능한 대학 면접시험 등 수능 외에 고교생을 옥죄는 다양한 입시 제도의 현실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들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안전 마진(safety margin)’이다. 실수를 해도 치명적 상황에 이르지 않을 수 있어야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안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수능 선택과목을 다시 늘려 한두 과목은 실패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 수험생과 평가원을 포함해 입시 당사자들이 오류와 시행착오에 여유를 갖고 대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사교육이 개입할 여지를 줄이기 위해 입시를 단순화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단요 씨는 “지방 일반고에 진학한 학생이 사교육 도움 없이 내신과 수능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입시 정책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책은 나온 지 한 달 만에 초판 3000부가 매진돼 최근 2쇄를 찍었다. 아르바이트 등으로 사설모의고사 출제 경험이 있는 저자들은 “책이 마치 사교육 업체 광고처럼 받아들여질까 봐 걱정”이라면서도 “현실을 바꾸려면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썼다. 앞으로 입시 제도를 손볼 때 논의의 토대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6일이면 수능이 꼭 100일 남는다. 수험생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묻자 여러 차례 수능을 쳤다는 문 씨는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책을 쓰면서 여러 명을 인터뷰했는데 지난해 역대급 불수능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학생이 좋은 결과를 내는 걸 봤습니다. 올해 수능 난이도가 어떨 것이란 예상이나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당일 눈앞의 시험지에 집중하고 설사 몇 문제 틀렸더라도 멘털(정신)을 잡고 끝까지 버티면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문호진(34)
△1990년 인천 출생
△2022년 인하대 의대 졸업
△2023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중앙집행위원
△현재 서울의 한 공공병원에서 근무 중

단요

△경기 출생
△2022년 소설 ‘다이브’로 데뷔
△2023년 문윤성 SF 문학상, 박지리문학상 수상
△2024년 문인동네 신인상 평론 부문 당선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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