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놈인지 보여줄게”...28초만에 5득점, 특급조커 신들린 맹활약

김지한 기자(hanspo@mk.co.kr) 2024. 8. 1.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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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싱 男 사브르 단체전 3연패
‘신스틸러’ 도경동 결승 활약
오상욱 개인전 이어 2관왕
구본길 “동생들 덕분에 金따”
막내 박상원과 11살 차이
“펜싱 10연패 못하란 법 없어”

◆ 2024 파리올림픽 ◆

2024 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 정상에 오른 한국 대표팀의 구본길, 박상원, 오상욱, 도경동(왼쪽부터)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감격에 젖어 있다. [파리 = 이충우 기자[
불과 3개월 전에 대표팀이 확정됐지만, 선배들의 내공과 후배들의 패기를 무기로 장착한 ‘뉴 어펜저스’는 세계 최강이었다.

1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이 끝난 뒤, 구본길·오상욱·도경동·박상원은 하나같이 서로에게 금메달 공을 돌렸다. 구본길과 오상욱은 “동생들 덕분에 우리가 금메달을 땄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반면 도경동과 박상원은 “형들이 잘 이끌어줬기에 첫 올림픽을 멋지게 장식했다”며 선배들을 추켜세웠다.

이들이 정식 결성된 것은 지난 5월. 기존 펜싱 남자 사브르대표팀이었던 김정환, 김준호가 지난해 항저우아시안게임 이후 대표팀을 은퇴한 뒤로 국가대표선수촌 훈련 성과와 국제 대회 경기력 등을 통해 두 빈 자리를 채울 멤버로 도경동과 박상원이 낙점됐다. 오상욱, 구본길의 경험을 내세워 올림픽 단체전 3연패를 노렸지만 두 신예의 경험 부족 약점도 지적됐다.

그러나 ‘뉴 어펜저스’의 화력은 파리올림픽에서도 막강했다. 8강에서 캐나다를 45대33으로 완파한 대표팀은 4강에서 펜싱 종주국 프랑스를 45대39로 눌렀다. 한국 선수들의 빠른 공격 펜싱에 프랑스가 무너졌고, 그랑팔레를 가득 채우던 프랑스 홈 관중들의 함성은 일순간 사라졌다.

결승에서 헝가리를 만난 한국은 초반부터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박상원이 헝가리 간판 아론 실라지를 5대4로 누르고 앞서갔다. 그러나 헝가리도 만만치 않게 추격했다. 6라운드에서 안드라스 자트마리가 홀로 7점을 뽑아 한국이 30대29 1점차 근소한 리드를 지켰다.

31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 결승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한국 선수들이 태극기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파리 =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이때 ‘교체 멤버’ 도경동이 구본길 대신 투입됐다. 이날 대표팀이 치른 세 경기를 통틀어 처음 피스트에 선 도경동은 상대 크리스티안 랍을 줄기차게 몰아세우고 찔렀다. 단 28초 만에 5연속 득점. 그랑팔레는 도경동의 현란한 플레이에 순식간에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1점차였던 스코어도 6점차로 벌어졌다. 마지막에 나선 오상욱이 금메달을 결정짓는 포인트를 따내자 선수들은 일제히 피스트에서 기쁨을 나누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날 도경동은 경기가 끝난 뒤 비밀병기, 특급 조커, 신스틸러 등 다양한 ‘수식어 장인’이 됐다. 도경동은 “올림픽 금메달은 꿈이자 선수 인생 최종 목표였다. 김정환, 김준호 등 전(前) 사브르 국가대표 형들이 경기에 나가면 네가 어떤 놈인지 보여주라고 했는데, 제가 어떤 놈인지 보여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국군체육부대 병장인 도경동은 전역(10월16일)을 두달 앞두고 조기 전역 혜택도 받았다.

축구 선수를 하다 중학교 3학년 때 펜싱으로 전향한 도경동은 남들보다 늦게 종목을 시작했다. 늦은 만큼 훈련도 열심히 했고, 기량도 빨리 늘었다. 2019년 23세 이하(U-23) 아시아 펜싱 선수권대회 개인·단체전 2관왕에 오르며 국제 무대에 등장했고, 2021년 첫 국가대표가 됐다.

3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 결승 한국과 헝가리의 경기. 도경동이 득점 후 환호하고 있다. [파리 = 이충우 기자]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금메달리스트이자 도경동의 소속팀 대구시청을 이끌고 있는 오은석 감독은 “처음 도경동을 만났을 때는 재능은 있으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선수라 느껴졌다. 잘 다듬어주면 세계적인 선수가 될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파리올림픽 대표팀 전담보조코치였던 오 감독은 “경동이가 처음에는 자신감 없고 초조한 생각들이 많았다. 그래서 잘하는 동작을 반복해서 훈련하며 자신감을 끌어올리고 용기를 불어넣었고, 조금씩 자신감을 찾아갔다”면서 “여러가지 노하우를 가르쳐주니 빠른 시간에 따라와줬다. 이번 대회를 통해 경동이가 자신에게 온 기회를 제대로 잡았다”고 힘줘 말했다.
3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 결승전에서 헝가리를 이기고 금메달을 차지한 한국의 박상원과 오상욱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도경동은 팀내 분위기메이커 역할도 톡톡히 했다. 구본길은 “8강전에서 내가 부진한 경기를 하니까 경동이가 ‘형, 자신있게 해. (동료들) 믿고 뛰어’ 라고 하더라. 경동이가 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4강전부터 내 플레이가 나왔다”고 말했다. 결승에서 도경동은 조기 투입을 앞두고 원 코치를 향해 “날 믿어달라”는 한마디만 하고 피스트에 올랐고, 신들린 듯 한 플레이로 보답했다. 경기 후 도경동은 “투입될 때 형들이 불안해하지 않게끔 믿음을 줬다. 그만큼 나도 질 자신이 없었다”며 웃어보였다.

도경동과 함께 대표팀 새 멤버로 합류한 ‘막내’ 박상원도 두 형들과 주축 멤버로 나서 패기넘치는 플레이로 강렬한 올림픽 데뷔전을 치렀다. 준결승전부터 단체전 첫 순서를 맡았던 박상원은 결승 1라운드에서 2012~2021년 올림픽 사브르 개인전 3연패 주인공인 아론 실라지를 상대로 5대4로 앞서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어 도경동이 점수 차를 벌린 8라운드에서도 금메달로 향하는 중간 다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박상원은 “선배들이 너무 잘해서 중압감도 크고, 걱정도 많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갔다”면서 “펜싱을 시작할 때 TV로만 봤던 원우영 선생님, (구)본길이형과 함께 해냈다는 것이 감회가 새롭고 신기하다”고 말했다.

개인전과 함께 단체전도 석권해 한국 펜싱 첫 올림픽 2관왕을 달성한 오상욱은 이번 대회를 통해 한국 펜싱의 간판 선수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오상욱은 “개인전은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기분이 좋았고, 단체전은 아시아 최초의 2관왕으로 역사를 쓸 수 있어 영광스러웠다”면서 “최근 3년간 두번의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으로 쉼없이 달렸다. 이제는 조금 쉴 수 있는 틈이 생긴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도경동이 “우리는 오상욱의 시대에 있다”고 하자 오상욱은 “우리는 새로운 어펜저스의 시대에 있다”고 맞받았다. 오상욱은 후배들의 활약상에 ‘펜싱판 어벤저스’를 뜻하는 ‘어펜저스’의 새로운 활약을 기대했다. 그는 “새로운 어펜저스는 기존 어펜저스보다 좀더 파워풀하고 패기가 있다. 쓰나미를 일으키는 것 같은 힘이 좀 더 있다”면서 “후배들의 의지만 있다면 진짜 뉴 어펜저스가 더 강해질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31일 오후(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 결승 한국과 헝가리의 경기. 구본길 선수. [파리 =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올림픽 단체전 3연패에 모두 함께 했던 구본길은 화려한 올림픽 ‘라스트 댄스’를 췄다. “가장 실력이 뛰어났고, 가장 금메달을 향한 자신이 있었던 건 이번 대회”라던 구본길은 “후배들이 솔직히 많은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고, 힘들어했다. 그걸 버텨내고 이겨내 좋은 결과를 만들어줘 후배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당초 이날 둘째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었던 구본길은 아내의 코로나19 감염 여파로 출산이 이달 5일로 늦춰진 사실도 털어놨다. 구본길은 “그래도 아내가 ‘세상에 늦게 나오는 아이가 금메달 따라고 행운을 주는 거니까 열심히 해달라’고 해 그 기운을 얻은 것 같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떳떳하게 귀국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이번 대회가 마지막 올림픽이라고 한 구본길은 2년 뒤 아이치·나고야아시안게임에 대한 출전 의지는 강하게 밝혔다. 구본길은 “아시안게임은 국가대표 선수로서 남은 마지막 목표다. 갈 수 있다면 도전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선수들은 올림픽 3연패 비결로 끈끈한 팀워크를 단연 첫손으로 꼽았다. 대표팀은 1989년생 ‘맏형’ 구본길부터 2000년생 ‘막내’ 박상원까지 최고 11살 차이가 난다. 그러나 서로 간의 세대 차와 벽은 느껴지지 않았다. 1999년생 도경동은 “우리는 단순한 선·후배가 아니라 형·동생처럼 지낸다. 형들과 편하게 대화도 많이 나누고, 팀워크가 더욱 단단해지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펜싱 남자 사브르대표팀은 이제 4년 뒤 LA올림픽을 기약했다. 박상원은 “대표팀이 파리 올림픽에서 최고의 성적을 냈지만, 끝이 아니다”고 했고, 도경동은 “한국 사브르는 세계 최강이다. 그 어떤 나라에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제자이자 후배들을 본 원우영 코치는 “올림픽 10연패도 가능할 것이다. 못하란 법이 있나”라고 거들었다. 한국 펜싱 남자 사브르의 또다른 도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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