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오대산 월정사 적멸보궁 가는 길
세속의 어지러운 심사를 잠시 식히겠다며 월정사 지나 상원사도 지나 적멸보궁 오르는 길. 초행이 아니라서 몇 년 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나는 꽃동무들과 오대산 비로봉까지 가는 중이었다. 얌전하던 길이 돌연 가파르게 전개되더니 계단 위로 기발한 기와지붕의 중대사자암이 나타났다. 길의 한 매듭인 그곳에서 호흡을 간추린 뒤 급경사를 오르면, 그 어떤 적멸 세계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특별한 실감이 든다. 여기는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이다. 부도탑 모양의 석등마다 염불 소리 낭랑하고, 저녁이면 은은한 등불이 길을 밝힌다. 우리가 찾던 귀한 야생화인 ‘청닭의난초’가 그 길섶에 피어 있었다.
세상 중요한 것에 날씨와 기분이 있다. 땀에 젖어 올라가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할머니 한 분이 있다. 연세가 상당하고 차림새에 절 냄새가 물씬 배어 있는 고운 분이다. 험한 길에 혼자는 아니고 딸인 듯한 이가 몇 걸음 뒤에서 물병을 들고 할머니를 내내 살피고 있었다. 고되고 힘든 길을 올라야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건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몫이다. 업혀서 오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오늘의 해당사항이 아니다. 연신 땀을 훔치며 힘든 기색이 역력한 할머니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적멸보궁 순례도 이 일생에서는 이번이 마지막이라 여기시는 것일까. 나중에 나중에 당도한 어떤 낯선 문 앞에서 적을 한 줄의 이력을 장만하시려는 걸까.
한마디 붙이려다가 잠자코 있는 쪽을 택했다. 할머니의 지금 사정은 희미한 미소조차 힘든 일임에 틀림없겠다. 우리 일행도 여러 꽃과 나무들을 동정하고 공부하느라 더딘 걸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 적멸보궁 앞에서 쉬고 있는데 아, 드디어 할머니께서 올라오셨다. 지금도 생생한 할머니의 환희심 가득 찬 그 표정.
나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어쩌다 오대산 근방이라도 지나치려면 그때 그 할머니 생각이 났다. 오늘 그 할머니의 안부를 궁금히 여기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아마 당신은 짐작조차 않겠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문수보살이 나투신 모습이었던 그 할머니를 잠시 떠올리는데 멀리 마지막 계단을 짚으며 아내가 힘겹게 올라왔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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