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오자와 진보정치의 헤어질 결심 [이원재의 사실과 진실]
이원재 |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도널드 트럼프의 러닝메이트가 된 제임스 데이비드 밴스는 흙수저 출신이다.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은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이 모여 산다는 러스트벨트에 속해 있다. 1970년대 미국이 생산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본주의로 전환한 후, 백인 제조업 노동자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쭉 내리막길을 걸었다. 오늘날 ‘낙오자’는 이들 계층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가난과 역경을 딛고 예일대 로스쿨, 실리콘밸리 변호사를 거쳐 30대에 상원의원에 당선된 밴스의 인생은 버락 오바마를 닮았다. 실제로 그는 오바마가 자신과 같은 환경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준 정치인이라는 찬사를 뉴욕타임스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밴스가 유명해진 건 이 같은 성취보다, 성취 이전의 삶을 다룬 회고록 때문이었다. 정여울은 그의 ‘힐빌리의 노래’가 낙오자들의 “차마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분노를 복잡하고 처절하게” 그려냈다고 상찬했다.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 힘있게 전달됐다. 그런데 이 당사자성은 밴스가 낙오자들의 개인적 문제들을 노골적으로 거론해도 되는 안전핀이기도 했다. 그가 기억하는 힐빌리들은 하나같이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무기력했다. 이 때문에 사회학자 제니퍼 실바는 밴스가 경제적 불평등하에서 신분 상승의 길이 막힌 이들의 구조적 고통을 외면했으며, 이를 통해 자기 성공을 부각시켰다고 힐난했다.
민주당 지지자인 폴 크루그먼은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그는 밴스가 “자기 지지자를 경멸하는 사기꾼”이라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한때 트럼프를 미국 히틀러라고 비난했다가 정치적 기회를 좇아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가 된 것이나, 선량하고 성실한 힐빌리들이 월가의 금융 귀족들 때문에 고통받는다며 구조적 개혁을 약속하는 것 모두 자신의 말을 뒤집은 것이다. 최근 암호화폐에 보인 우호적 태도를 보면, 겉으로는 월가를 비판하면서 뒤에선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편을 들고 있다. 결국 밴스는 노동자들의 실제 이익에는 별 관심이 없는 위선적 포퓰리스트라는 것이다.
그러나 크루그먼과 같은 진보 엘리트들의 태도는 낙오자들이 정작 무엇을 원하는지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밴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작년 여름 올리버 앤서니라는 백인 노동자의 노래가 빌보드 1위를 차지했다. 노래는 “뭣 같은 초과근무수당에 영혼을 팔고 있다”는 한탄으로 시작해 부자와 정치인, 복지와 소수자에 대한 비난으로 맺는다. 진보 언론 뉴욕타임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낙오자의 절망을 이해한다면서도, 가사에 나타난 복지와 소수자에 대한 태도를 들어 앤서니를 전형적인 우파 음모론자라고 규정한 것이다.
사실 낙오자들과 진보 정치 사이의 불화는 세계적 현상이다. 영국 북동부의 ‘다니엘 블레이크’들은 브렉시트에 찬성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특수를 누리게 된 프랑스 부르주의 낙오자들은 르펜의 강력한 지지자가 됐다. 이들은 자산보다 자존감을 앞세운다. 진보의 사회과학적 처방에 아랑곳하지 않는 낙오자들의 집단심리를 진보 엘리트들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힐빌리를 폄하했다며 밴스를 비판하던 크루그먼이 얼핏 속내를 드러냈다. “우리 민주당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면 반응이 어땠겠어?”
낙오자와 진보의 헤어질 결심은 한국에서 이미 현실화됐다.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은 0석을 얻었다. 여영국은 정의당이 정체성 정치에 너무 깊이 개입했고, 불평등 양극화 문제에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나는 정반대의 이유로 정의당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불평등 양극화는 한국 경제의 데이터에 부합하지 않는다. 2017년 탄핵 이후 한국 정치는 과학적인 현실 진단과 유리된 채, 팬덤 정체성에 기댄 권력투쟁 스포츠가 되었다.
이는 방송법을 둘러싼 여야의 이전투구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들의 과거를 기억한다면 생중계로 경합한 최민희와 이진숙 중 누구에게도 방송 공공성을 위한 비전과 결심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사이 공영방송이 보여준 변화라면 주진우와 이동형을 고성국과 배승희로 대체한 것뿐이다. 정치를 초월해 수준 높은 공공성을 달성할 수 있었던 몇번의 소중한 기회들을 덧없이 흘려보낸 결과다. 지난 20년간 시민단체, 노동조합, 텔레비전 방송사 지도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고점 대비 각각 32%, 25%, 21% 감소했다. 모두 2017년 이후 감소 폭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 국민은 이들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중이거나 이미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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