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9. 부천 한국만화박물관
부천은 만화의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한 도시다. 지하철 7호선 삼산체육관역 5번 출구에서 도보로 1분쯤 걸으면 나타나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만화를 산업으로 예술로 승화시키는 기관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한국만화도서관’이 있다. 한국 만화 100주년에 맞춰 2009년 개관한 한국만화박물관은 만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찾아봐야 할 명소다. 우리 만화 유산의 가치를 발굴하고 보존하며 다양한 전시를 통해 만화의 예술적 위상을 높이고 있는 한국만화박물관은 ‘오감으로 즐기는 만화천국’이다.
■ 오감으로 즐기는 만화 천국
종이책 대신 스마트폰으로 전달 매체가 바뀌었을 뿐 만화의 인기는 여전하다. 젊은 직장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드라마 ‘미생’이나 2020년 3월 수도권에서 18.3%라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일본 넷플릭스 순위 1위에 올랐던 ‘이태원 클라쓰’ 역시 원작이 웹툰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듯 만화는 여전히 대중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지난 5월부터 국립민속박물관과 진행하는 K-Museums 공동기획전 ‘만화로 만나는 힙합’을 통해 다시 확인한다. 만화와 힙합은 어떻게 만났을까. 전시를 기획한 박혜원 매니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만화를 매개로 음악과 영상, 미술로 확장되는 융복합 전시를 통해 K-컬처 한국 힙합이 지닌 역동성과 자유로운 감성을 관람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획했습니다.” 1부는 한국 힙합의 역사를 보여준다.
“한국 힙합은 1989년 발표된 홍서범의 ‘김삿갓’을 원조로 현진영,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를 거쳐 1999년 드렁큰 타이거가 등장하면서 한 단계 도약하게 됩니다. 2010년이 되면 힙합은 한국의 가장 뜨거운 대중음악 장르로 올라서지요.” 세계가 주목하는 케이팝 산업의 흐름을 한국 힙합이 이끌고 있다는 설명이다.
2부는 자유분방한 ‘거리의 예술’로 불리는 그래피티를 소개한다. 작가 심찬양의 작품은 선과 색, 무엇보다 소재가 강렬하다.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는 심찬양의 작품에 흑인 여성이 자주 등장한다. 보랏빛 수국꽃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흑인 여성의 옆모습이 매혹적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린 소녀가 턱을 괴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림 앞에 선다. 소녀 곁에 배치한 호랑이의 눈빛도 마주 선 이를 향해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누가 한국인이냐?”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물을 통해 작가가 생각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전율한다. 스프레이로 이토록 섬세하게 사람의 얼굴, 생기가 도는 눈동자를 표현할 수 있다니 그 놀라운 재능에 다시 감탄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 전시실로 이동한다. 3부는 더 편하고 재미있다. 김수용, 이빈, 김재한 작가가 참여한 3부는 만화에 담긴 힙합의 정신을 친절하고 흥미롭게 전달한다. 힙합의 자유로운 정신을 작품의 주인공 입을 빌려 전달하는 작가의 발언이 단호하다. “그런 건 내가 결정해.”
■ 만화의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
한국만화박물관은 ‘아빠의 추억과 아이의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누구나 만화는 세대를 뛰어넘어 함께 즐길 수 있는 매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층에는 만화영화상영관과 체험마당,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와 수유실까지 갖추고 있다. 2층에 오르면 만나는 만화도서관은 만화를 맘껏 볼 수 있는 넓고 쾌적한 공간이다.
“약 4만권의 만화가 진열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입니다.” 이미정 박물관 팀장의 안내를 받아 시설을 둘러보며 공간의 규모에 압도된다. “매달 두 차례 신간이 들어온다니 언제 찾아오셔도 따끈한 신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반열람실과 영상열람실, 아동열람실까지 갖춘 만화도서관은 ‘최고’라는 자랑이 지나치지 않다. 전문가 100명이 엄선한 ‘한국 만화명작 100선’과 이달의 추천 만화를 소개하는 오픈 라이브러리 ‘꿈바라’는 빠뜨리지 말고 챙겨봐야 하는 곳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올라가면서 만화박물관 1층과 2층의 내부를 내려다본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동행한 가족 단위의 관람객은 물론이고 혼자 찾은 듯한 중년 관람객도 많이 보인다. 세대와 성별을 떠나 누구나 즐기는 만화의 특성을 다양한 유형의 관람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3층에 마련된 상설전시관은 볼거리가 가장 많은 공간이다. 상설전시관에 들어서는 관람객은 피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만화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만화가와 학자는 어떻게 설명할까. 이이남 작가의 미디어아트 ‘크로스오버 디지털 병풍’은 산수화 속에 만화 주인공을 등장시켜 만화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그 영역을 확장한다. 만화의 명장면으로 이뤄진 ‘만화의 벽’을 통과하면 반가운 이름과 마주한다. ‘만화가게’와 ‘보물섬’, ‘아이큐점프’와 ‘윙크’ 등 옛날 만화 잡지가 가득하다. 공간을 디자인한 방식 또한 만화처럼 재밌다.
만화가 200여명의 펜이 전시된 유리관이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강창욱 고우영 화백을 비롯해 200여명의 유명 작가가 사용한 펜이 전시됐다. 작가의 성품과 개성을 드러내듯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펜의 모양과 색깔과 길이도 제각각이다. 천계영 작가의 마우스와 최규석 작가의 드로잉패드는 시대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젊은 여성의 손목이 ‘주먹대장’보다 더 굵다.
1909년 6월 창간된 대한민보 1면에 시사만평인 ‘삽화’를 연재한 이도영 작가의 선이 굵고 힘차다. 항일 구국정신을 고취하던 그의 만화 연재는 1910년 8월31일 대한민보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면서 마감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책은 무엇일까? 1946년 출판된 김용환의 ‘토끼와 원숭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만화책으로 표지가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된다.
1950년부터 2000년까지 최장 기간 연재된 김성환의 ‘고바우영감’ 원화(1951~2000년)와 발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1958년), 그리고 한국 현대 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1953~1954년)도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만화는 전국 방방곡곡 마을로 스며든다. 상설전시실은 만화가 왜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전시관 밖에도 볼거리가 넘친다. 벽면을 장식한 그림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대표 만화 캐릭터로 만든 ‘만화가 명예의 나무’입니다. 만화가의 꿈을 키워주는 전시물이지요.”
■ 3대가 어울려 소통하는 곳
1970년대는 일간지 극 만화가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고우영의 삼국지’가 신문 구독자 수를 크게 늘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 만화계의 황금기인 1980년대에 창간된 ‘보물섬’은 만화 잡지의 대명사였다. 이런 잡지를 통해 이수정의 ‘둘리’와 ‘하니’ 같은 유명한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다.
체험 전시관이 있는 4층은 특히 인기가 많다. ‘만화가의 머릿속’은 만화가의 작업 공간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이다. 꿈꾸는 만화가의 머릿속은 거울 미로로 구성됐다. 작품을 구상하고 마감 시간에 쫓기는 만화가의 일상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물론 만화박물관이라 해서 의자에 앉아 만화책만 보는 곳이 아니다. 만화 속 캐릭터가 돼 체육 활동이 가능한 ‘스마트 체육관’도 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관람객이 이현세 작가의 ‘공포의 외인구단’ 만화를 배경으로 한 야구 체험을 즐기고 있다.
만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볼 수도 있다. 관람객은 자신이 원하는 만화 장면을 직접 선택해 촬영하고, 즉석에서 사진을 받아볼 수 있다. ‘만화 특별시 부천’의 한국만화박물관은 화장실에서도 만화를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만화 천국’이다. 만화의 재미에 풍덩 빠지면 한여름 무더위도 금세 지나갈 것 같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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