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실력만 닦으세요”…‘활·칼·총’ 금메달의 키다리 아저씨들 [파리2024]
재계 숨은 조력…안정적 협회 운영
실력만으로 선수 선발 → 메달 성과
[헤럴드경제=안효정 기자·차민주 수습기자] 2024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를 목표로 했던 대한민국이 대회 초반 메달 레이스에서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치고 있다. 특히 펜싱, 사격, 양궁 등 이른바 ‘활·칼·총’ 종목의 눈부신 활약이 돋보인다.
체육계에서는 한국이 이들 종목에서 강세를 보이는 원인으로 ‘후원기업-협회-선수 간의 성공적 협업’을 꼽는다. 후원기업의 충분한 투자가 협회의 안정적인 경영으로 이어져 선수들이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선순환 체계가 구축된 것이다.
▶공정성·투명성만 본다…현대차·양궁협회의 모범 지원=대한민국 양궁은 28~29일(현지시간) 파리 올림픽 단체전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남자 단체는 3연패, 여자 단체는 10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한국 양궁이 올림픽 무대를 ‘장기집권’하게 된 배경에는 대한양궁협회의 전폭 지원이 있다. 협회는 종목별 단체 중에서도 단연 모범이다. 학벌이나 파벌, 혹은 과거 명성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 ‘공정성’이 담보된 국가대표 선발 과정을 운영한다. 오로지 개인 실력만이 대표 선발을 가르는 잣대다. 지난 도쿄 대회에서 양궁 3관왕을 거둔 안산 등의 선수가 이번 올림픽엔 출전하지 못한 이유다.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은 험난한 과정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러 선발 시 1년간 자격을 유지하는데, 선발 과정에만 약 6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총 6회전으로 구성된 선발전에 나서는 선수들은 3000여 발의 활을 쏜다. 협회는 각 후보의 평균값을 책정해 순위권 내에 들어선 선수만을 대표로 뽑는다.
이 공정성은 대표 선발뿐 아니라 협회의 코치와 행정 인력을 채용하는 데도 적용된다. 협회는 코치 트레이너 또한 매년 공채를 통해 투명하게 등용한다.
양궁 선발전과 협회 운영이 공정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스포츠계는 현대자동차그룹의 후원 원칙을 꼽는다. 현대차그룹의 양궁 후원 역사를 살펴보려면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5년 정몽구 선대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국 양궁의 신화가 시작됐다.
‘공정성과 투명성만 볼 뿐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현대차그룹이 협회를 후원할 때 지키는 철칙이다. 이 덕분에 양궁계에서는 불합리한 관행, 불공정한 선수 발탁 문제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현대차그룹의 재정적 지원은 협회 구성원들 스스로 ‘철칙’을 고수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협회 내에선 ‘오직 선수 양성에 집중하면 그만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공유된다. 기업의 후원 원칙이 협회의 인적 자원 토대까지 자연스레 마련한 모범 사례다.
▶펜싱, ‘키다리 아저씨’ SK그룹에 힘입어 성장=2008 베이징 올림픽부터 2024 파리 올림픽까지 꾸준하게 성과를 내고 있는 펜싱도 비슷하다. 펜싱의 후원자는 SK그룹이다. 2003년 손길승 SK텔레콤 전 회장이 재정 위기에 처한 대한펜싱협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펜싱과 SK그룹 간의 인연이 시작됐다. SK그룹의 지원으로 협회 구성원에 대한 경제적 보상과 기회가 늘어나면서 선수 기량과 지도 역량이 함께 향상됐다. 자금에 여유가 생기자 선수 역량과 공정성에 보다 집중하게 된 것이다.
펜싱 국가대표는 국내 4개 대회 성적과 국제 연맹 세계랭킹 포인트를 합한 총점 순위대로 선발한다. 특혜를 부여하거나 편파적 평가가 반영될 여지가 없는 체제다. 2020 도쿄 올림픽이 1년 연기됐을 때도 이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 새 대표팀을 선발했다. 과거 명성에 집착하기보다 올림픽 경기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선수를 뽑으려는 취지다.
현대차그룹처럼 SK그룹도 협회의 경영 지원에 적극적이다. SK그룹은 스포츠 경영 전문가를 협회 임원이나 분과위원으로 임명하며 행정·경영 전문성을 지원한다. 또 협회 급여 체계와 복지 수준을 개선해 우수 인재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펜싱협회는 스포츠 종목 단체 중 가장 근무 여건이 좋고 뛰어난 직원이 많은 단체로 꼽힌다.
▶한 명씩 탈락 ‘녹아웃’ 선발전…한화의 손길 닿았다=사격에서 뜻밖의 선전도 눈에 띈다. 한국 사격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은메달 1개를 따는데 그치면서 금맥이 끊겼다. 그러나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2개를 따내면서 예상 밖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이 폭발적인 성장이 가능했던 건 2016년 선발전부터 도입된 ‘녹아웃 방식’ 때문이다. 녹아웃 방식이란 결선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기록한 선수를 차례로 탈락시키는 구조다.
이는 한화그룹의 물심양면이 빛을 발한 결과다. 사격은 한화그룹의 지원에 힘입어 2000년대 초반부터 훈련 역량을 갈고 닦았다. 국내 사격 인재 육성을 위해 2001년 한화갤러리아 사격단을 창단했고, 2002년 6월부터 2023년까지 대한사격연맹 회장사를 맡았다.
아울러 한화는 국제 사격 규정에 맞춰 종이 표적이 아닌 전자 표적으로 경기를 진행토록 지원하고, 온도에 큰 영향을 받는 사격 경기의 특성을 고려해 겨울에는 따뜻한 나라에서 선수단이 전지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드러난 사격 성과에는 한화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
김유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이번 양궁·펜싱·사격의 활약 원인을 ‘기업의 투자를 바탕으로 한 협회의 성공적 경영’으로 봤다.
김 교수는 “현대차그룹과 SK그룹 등이 충분한 자금을 지원하니 협회는 좋은 선수를 길러내는 데에만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된다”며 “협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신뢰가 생기면 선수·코치부터 협회 내 행정인력까지 전 분야의 역량 높은 사람들이 그 협회로 몰리는데, 이것이 성공적 경영을 위한 중요한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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