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을 피하는 법, ‘평냉’ 아니고 ’함냉’입니다!

박미향 기자 2024. 8. 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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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의 미향취향 함흥냉면 투어
‘오장동함흥냉면’에서 파는 ‘회냉면’. 박미향 기자
미향취향은?

음식문화와 여행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자의 ‘지구인 취향 탐구 생활 백서’입니다. 먹고 마시고(음식문화), 다니고(여행), 머물고(공간), 노는 흥 넘치는 현장을 발 빠르게 취재해 미식과 여행의 진정한 의미와 정보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폭염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양산을 펼쳐도, 선글라스를 써도 도무지 더위가 가시지 않는다. 한 모금 마시면 한기가 돌 정도로 시원한 평양냉면을 찾는 이가 많아진 이유다. 하지만 1시간 넘게 줄을 서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맛을 보기도 전에 고역을 치른다. 평양냉면이 아니더라도 ‘냉면’을 먹으며 더위를 식힐 방법이 없을까. 함흥냉면을 대안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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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흥 지역이 고향인 함흥냉면은 감자나 고구마 전분으로 가늘게 뽑은 면에 매운 양념을 넣어 비벼 먹는 음식이다. 본래 한반도 북쪽엔 매운 음식이 적은 편인데, 특이하게도 함흥냉면은 맵다. 여기에 식초, 설탕, 고추장 등으로 버무린 가자미무침이나 홍어무침을 고명으로 얹어 먹는다. 차가운 육수를 부어 ‘물냉면’으로 먹기도 한다. 함흥냉면집에 가면 차림표에 흔히 ‘회냉면’ ‘물냉면’이 함께 적혀 있는 이유다. 종류가 2가지인 셈이다.

하지만 함흥에는 ‘함흥냉면’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함흥냉면’이라고 부른 음식이 없었다는 소리다.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온 함흥 사람들이 고향에서 먹던 국수에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게 정설이다. 이 지역 전통 음식인 ‘회국수’나 ‘감자농마국수’가 ‘함흥냉면’인 것이다. 생계유지를 위해 식당을 차린 함흥 사람들이 평양냉면집에 맞서 지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오장동함흥냉면’에서 파는 ‘회냉면’. 박미향 기자
‘오장동함흥냉면’에서 파는 ‘비빔냉면’. 박미향 기자

둘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함흥냉면이 평양냉면에 견줘 도드라지게 다른 점은 면이다. 쫄깃하고 찰지다. 심지어 질기다고 평하는 이도 있다. 1989년 7월4일 ‘조선일보’ 칼럼을 보면, 평양과 함흥 두 곳에서 산 경험이 있는 이가 하는 말이 흥미롭다. 함흥냉면을 ‘나일론 냉면’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그는 함흥 지역 연인들이 함흥냉면을 먹는 방식도 언급했다. 연인들은 한 그릇을 놓고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글도 남겼다. ‘양쪽에서 먹어 들어가다 보면 결국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고 말이다. 광고나 드라마에 흔하게 등장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파스타 한 줄을 서로 물고 눈동자를 마주치는 연인들 말이다. 메밀이 아닌 감자녹말로 면을 만든 이유는 함흥 지역에서 생산되는 감자가 질이 좋고 양이 많아서였다.

함흥냉면은 더위를 쫓아내는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 더구나 평양냉면 집처럼 긴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 매운맛의 주성분은 캡사이신이다. 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 등은 미각에 속하지만, 매운맛은 통각이다. 통각은 땀을 흘리게 하고, 맥박을 빨리 뛰게 한다. 함흥냉면은 매콤하다. 한두 젓가락만 먹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누구에게나 있는 경험이다. 땀이 식는 동안 더위도 가신다. 매운맛에 놀란 혀를 따끈한 육수로 위로하면 금세 통증이 가라앉는다. 이 또한 더위를 날리는 방법이다. 면의 질긴 식감은 차갑다는 인상을 준다. 1973년 8월9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한여름에 맵고 질긴 함흥냉면과 씨름하고 육수를 들이켜면 더위를 가실 수 있다’고 말이다.

‘명동함흥면옥’에서 파는 함흥냉면. 박미향 기자
‘명동함흥면옥’에서 파는 함흥냉면. 박미향 기자

갈 만한 함흥냉면 맛집이 궁금해진다. 속초, 양양 등 강원도에 함흥냉면 노포가 많지만, 서울에도 품격 있는 노포 함흥냉면 집이 여럿이다. 명동에 있는 ‘명동함흥면옥’은 고구마 전분만 사용해 면을 만들어 식감이 매우 보드랍다. 맵싸한 면을 입안에 영접하면 혀를 타고 면이 미끄러지듯 몸 안에 들어간다. 찬 느낌은 상쾌하다. 1970년대 말 문 연 이 집은 노포지만, 젊은 세대도 ‘애정’하는 곳이다. 2030세대가 넘쳐나는 명동이란 지역의 특수성이 명맥을 잇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실내는 대부분 옛 모습 그래도 유지하고 있다. 정감 있다. ‘회냉면’은 1만3천원, ‘물냉면’과 ‘비빔냉면’은 1만2천원이다.

‘명동함흥면옥’에서 파는 함흥냉면. 박미향 기자
‘명동함흥면옥’ 2층 실내. 박미향 기자

오장동엔 ‘함흥냉면 거리’라 불리는 데가 있었다. 1960~70년대만 해도 식당이 10곳이 훌쩍 넘을 정도로 성업했던 지역이다. 지금은 평양냉면 기세에 밀려 몇 집 남아있지 않다. 그중에서 ‘오장동함흥냉면’이야 말로 노포 중의 노포다. 1958년 문 열었다. 식탁 간 사이가 넓어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냉면을 즐길 수 있다. ‘회냉면’과 ‘비빔냉면’ 양념이 다를 정도로 정성을 기울이며 손님을 맞는 곳이다. ‘회냉면’ ‘물냉면’ ‘비빔냉면’ 모두 1만5천원이다. ‘오장동함흥냉면’ 인근에 있는 ‘오장동흥남집 본점’도 1953년에 문 연 노포다.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이 집은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오장동흥남집 본점’ 주인들. 업장 누리집 화면 갈무리

‘오장동함흥냉면’에 있는 ‘회냉면’은 잇몸과 점막까지 접수하는 매운맛이다. 젓가락질할수록 땀이 이슬방울처럼 맺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릇을 다 비울 때쯤엔 땀방울이 사라지고 없다. 바람이 와서 어루만지고 간듯한 상쾌한 기분이 든다. 폭염이 얼굴을 들이밀 틈이 없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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