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의 검객, 종주국서 3연패… 닥공으로 金 찔렀다

파리/장민석 기자 2024. 8. 1. 04: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구본길(왼쪽부터), 박상원, 오상욱, 도경동이 7월 31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 시상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3연패를 의미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

‘뉴 어펜저스’가 세계 정상을 찔렀다. 한국 남자 사브르가 올림픽 단체전 3연패(連覇)의 대위업을 달성했다. 오상욱(28)은 개인전 금메달에 이어 단체전도 석권하면서 한국 펜싱 사상 첫 2관왕의 주인공이 됐다.

오상욱과 구본길(35), 박상원(24), 도경동(25)으로 구성된 한국 대표팀(세계랭킹 1위)은 31일(현지 시각)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 결승전에서 세계랭킹 3위 헝가리를 45대4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대한민국 펜싱 대표팀 박상원(왼쪽부터), 오상욱, 구본길, 도경동, 원우영 코치가 7월 31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 금메달 결정전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금메달을 확정지은 후 손가락으로 3연패 달성을 의미하는 표시를 하고 있다. /뉴스1

한국 남자 사브르는 2012 런던 대회와 2020 도쿄 대회에 이어 단체전 3연속 금메달을 따냈다. 2016 리우 올림픽에선 사브르 단체전이 열리지 않았다.

한국 사브르는 김정환(41)과 구본길, 오상욱, 김준호(30)로 이뤄진 ‘어펜저스(어벤저스+펜싱)’로 전성기를 누렸다. 도쿄 올림픽과 세 차례 세계선수권, 두 차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합작했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이후 김정환과 김준호가 각각 부상과 은퇴로 빠진 가운데 이제 신예 박상원과 도경동이 합류한 ‘뉴 어펜저스’로 파리에서 대기록을 달성했다. 결승 7라운드에 교체로 나온 도경동은 연속 5득점으로 승부의 흐름을 한국으로 가져왔고, 박상원도 주전으로 맹활약했다.

구본길(왼쪽부터), 박상원, 도경동, 오상욱이 7월 31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 결승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금메달을 확정한 뒤 기뻐하고 있다. /뉴시스

넷은 올림픽을 앞두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특히 두 신예가 새로 합류한 만큼 두 선배의 어깨가 무거웠다. 오상욱은 “우리는 구본길, 오상욱, 박상원, 도경동이란 각자의 브랜드가 있다. 자부심을 가지고 대회에 임하자”고 했다. 구본길은 “우리는 선후배 관계가 아닌 동등한 선수 사이다. 우리가 못하면 너희가, 너희가 못하면 우리가 커버해줄 수 있다. 서로 믿고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사브르 대표팀은 올림픽을 앞두고 성적이 썩 좋지 못했다. 지난 4월 선수들이 ‘지옥 훈련’이라 표현한 강도 높은 체력 훈련을 소화했던 대표팀은 그 여파인지 5월 마드리드 월드컵에서는 단체전 8강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우직하게 체력을 완성한 후에 본격적으로 기술을 가다듬으면서 올림픽이 다가올수록 경기력과 컨디션이 올라왔다. 빠른 스텝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발 펜싱’이 주특기인 한국으로선 체력이 뒷받침되면 무서울 게 없었다. 지난달 아시아선수권 단체전 정상에 오르며 워밍업을 마친 ‘뉴 어펜저스’는 올림픽 무대에서 세계랭킹 1위다운 기량을 과시하며 정상에 섰다.

개최국이자 종주국 프랑스와 만난 4강전이 고비였다. 프랑스 홈 팬들은 쉴새 없이 응원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그랑 팔레의 분위기를 휘어잡는데 전날 한국 여자 에페 팀이 그 기운에 휩쓸려 제대로 손 써보지 못하며 8강에서 프랑스에 덜미를 잡혔다.

하지만 ‘뉴 어펜저스’에겐 프랑스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이 장애물이 되진 않았다. 여유 있게 앞선 끝에 승리했다. 노련한 구본길은 오히려 과장되고 도발적인 세리머니로 홈 팬들을 자극했다. 야유가 쏟아졌으나 점수는 점점 더 벌여졌다. 구본길은 “프랑스 응원은 오히려 심판을 자극할 수 있다. 심판이 흔들릴 법도 한데 냉정하게 잘 잡아줘 우리에겐 더 좋았다”고 했다.

대한민국 펜싱 대표팀 구본길, 오상욱, 박상원, 도경동이 7월 31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 금메달 결정전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금메달을 확정지은 후 원우영 코치를 헹가래 치고 있다. /뉴스1

사브르 대표팀은 진천 선수촌에서 현지 팬들의 응원에 대비해 스피커를 통해 강한 소음을 내서 이를 견뎌내는 훈련을 했는데 이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이 구본길의 설명이다. 일부러 불리한 판정을 해서 멘털을 흔드는 모의 훈련을 하는 등 대표팀은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놓고 이를 대비했다.

헝가리와 결승은 팽팽하게 진행됐다. 한국은 프랑스와 4강전 때처럼 박상원이 1·4·8번, 오상욱이 2·6·9번, 구본길이 3·5·7번으로 나섰다.

그랑 팔레를 메운 한국 관중들이 “대~한 민국!”을 외치는 가운데 박상원이 런던·리우·도쿄 3연속 우승의 전설 아론 실라지를 상대했다. 박상원은 대등한 경기를 펼친 끝에 5-4로 앞선 채 1라운드를 끝냈다. 이어 나온 오상욱이 10-8로 리드를 유지하며 2라운드를 마쳤다.

구본길이 3라운드에 출격해 안드라스 사트마리와 대결했다. 12-11로 앞선 상황에서 구본길은 칼을 바꾸며 숨을 고른 뒤 15-11로 점수를 벌린 뒤 바통을 넘겼다. 박상원은 20-17로 앞선 채 4라운드를 마무리했다. 5라운드는 베테랑 구본길과 실라지의 대결. 구본길도 팽팽한 승부 끝에 25-22로 5라운드를 끝냈다.

에이스 오상욱이 6라운드에 등장했다. 오상욱이 연이어 실점을 허용하며 25-26으로 역전됐다. 접전이 이어지며 오상욱은 30-29, 1점 리드를 안고 피스트를 내려왔다. 원우영 코치는 7라운드에 구본길 대신 도경동을 투입했다. 도경동은 시원한 공격으로 5점을 연속으로 뽑아내는 퍼펙트 플레이로 승기를 가져왔다. 35-29.

박상원이 8라운드에 출격했다. 40-33으로 점수를 더 벌리고, 오상욱에게 마지막 라운드를 넘겼다. 오상욱과 실라지가 피스트에서 만났다. 연이어 실점을 허용하며 40-36까지 쫓겼다. 하지만 공격이 살아나며 다시 42-36으로 벌렸다. 44-41에서 오상욱은 마지막 공격을 성공하고 포효했다. 한국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순간이었다.

파리 올림픽 2관왕에 오른 오상욱. /올림픽공동사진취재단

사브르 대표팀이 절정의 호흡을 과시하며 정상에 오르면서 오상욱의 올림픽 통산 메달 개수는 3개가 됐다.

올림픽 통산 3개 이상 금메달을 수확한 선수는 동·하계를 통틀어 오상욱이 12번째. 사격과 양궁, 쇼트트랙이 아닌 종목에선 오상욱이 최초다. 192cm 큰 키에 순발력을 갖춰 ‘몬스터’라 불리는 오상욱은 도쿄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 이후 발목과 손목 부상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파리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하며 진정한 사브르 세계 최강자로 거듭났다.

구본길은 런던, 도쿄에 이어 파리에서도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맏형 구본길은 파리 금메달로 한국 펜싱의 명실상부한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 무대를 세 번째 금메달로 화려하게 장식하며 2012 런던과 2020 도쿄, 2024 파리까지 한국 사브르 3연패 위업에 모두 함께한 유일한 선수가 됐다.

구본길은 작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정상에 서면서 한국 역대 최다 금메달 타이 기록(6개)을 세웠다. 특히 대회 당시 개인 8강전에서 중국 선전펑에게 10-14로 밀리다 내리 5점을 따내 역전을 한 장면에서 처음 펜싱 칼을 잡던 순간을 떠올랐다. 초심을 찾은 그에게 파리 올림픽을 앞둔 시간은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구본길은 “마지막 올림픽이라 생각하니 내가 펜싱을 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준비하는 과정 한 순간 한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사브르 단체전이 열린 31일은 구본길의 둘째 아들 출산 예정일. 그러나 아내가 코로나에 걸려 제왕절개수술 날짜를 구본길 귀국날(8월 5일)에 맞추기로 했다. 구본길은 “이제 1년을 쉬면서 육아에 전념하려 한다”고 말했다.

첫 올림픽 무대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박상원.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뉴 어펜저스’에서 ‘황금 막내’로 통하는 박상원은 오상욱의 대전 송촌고 후배다. 박상원의 형인 박광원이 오상욱과 고교 동기. 어린 시절부터 움직이고 활동적인 걸 좋아하다보니 부모님이 펜싱을 권유했고, 형도 펜싱 선수를 하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이 길로 들어서게 됐다.

박상원이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21년 청두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개인전 금메달과 단체전 은메달을 따냈다. 구본길은 “파워풀한 펜싱을 구사하는 박상원은 민첩성 면에선 세계 최고라고 본다”고 말했다. 단체전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파이팅을 불어넣는 것도 박상원의 몫. 캐나다와 8강전에서 8-10으로 뒤진 상황에서 혼자 7점을 뽑아내며 15-11로 역전한 장면이 돋보였다.

후보 선수로 결승 7라운드에 출전, 5연속 득점으로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도경동은 키가 188cm로 오상욱(192cm) 만큼 피지컬이 좋은 펜서다. 학창 시절 점심 시간에 축구를 하다 펜싱부 감독에게 스카우트된 과정은 선배인 구본길과 비슷하다.

올해 트리빌시 월드컵에 손목 부상 중이었던 오상욱을 대신해 출전했다. 도경동은 단체전 결승에서 8라운드까지 38대4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날 결승에서 맞붙은 실라지(헝가리)를 상대로 45대44 대역전극을 일궈내며 한국에 우승을 안긴 바 있다. 국군체육부대 소속의 그는 이번 금메달로 조기 전역이란 혜택도 받게 됐다.

2012 런던 올림픽 금메달을 보고 자란 ‘런던 키즈’인 둘은 큰 무대에서 주눅들지 않고 제 역할을 해내며 다가올 LA 올림픽 4연패 전망을 밝혔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