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첫 야구장의 등장… 철도단지 개발로 인구 급증한 용산에 건립[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러일전쟁 발발에 군사기지 건설… 남은 땅, 일본인들에게 헐값 불하
용산역에 학교-병원-공원 들어서… 조선인보다 일본인 거주자 대다수
《용산역 개발과 도시화 과정
1908년 최남선이 지은 ‘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는 경부선의 출발역인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종착역인 부산역까지 여러 역을 열거하면서 그 주변의 새로운 풍물을 묘사하는 형식의 장편 기행창가이다. 창가의 첫머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관왕묘와 연화봉 둘러보는 중, 어느 덧에 용산역 다달았도다. 새로 이룬 저자는 모두 일본 집, 이천여 명 일인이 여기 산다네.” 관왕묘는 조선 시대 숭례문 밖에 있었다는 남관왕묘(南關王廟)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 측의 요구로 도성 인근에 세운 촉나라 장수 관우의 사당 중 하나이다. 연화봉은 청파동 일대의 옛 지명이다. 1908년은 러일전쟁에서 승전한 일본군이 용산에 상설 군사기지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일 때이다.》
‘경부텰도노래’는 군사기지뿐 아니라 이미 일본인 시가지가 대규모로 조성된 당시 용산의 모습을 잘 전해준다. 그렇다면 용산은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이렇게 변했을까?
용산에 근본적인 변화의 물결이 밀려온 것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나라, 일본, 영국 등은 이미 개항을 한 인천, 원산, 부산 등과 함께 도성 부근의 편리한 곳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처음 개시(開市)가 결정된 곳은 서양 국가들이 선호한 마포 양화진이었다. 그런데 일본 측이 민간이 이주할 거류지를 확보할 수 있고 양화진보다 도성 중심부와 거리가 더 가까운 곳을 찾던 중 용산을 ‘발견’했다. 일본은 곧 조선 정부와 용산 개시를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그런데 협상을 채 마무리하기도 전부터 용산에는 일본인이 불법적으로 상주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벌써 공식적인 ‘용산거류민규칙’이 시행되었다. 거류민 규칙이 시행된 것은 용산에 이미 ‘일본인 사회’라고 불릴 만한 것이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한반도를 통과하는 군용철도(경부선과 경의선)를 급히 완공하고자 용산역에 육군임시철도감부(陸軍臨時鐵道監部)를 설치하고 공사를 서둘렀다. 1905년 10월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도의 동쪽 약 300만 평을 수용해 군사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용산 기지의 기본적 시설은 병합 전인 1909년 8월경 완공되었다. 여러 부속 건물 공사도 대체로 1913년경까지는 완료되었다. 공사 과정에서 일본군은 기지 좌우 측에 용산에서 경성 도심부로 향하는 외곽 도로(현재 한강대로와 녹사평대로)와 군용지 전체의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현재 이태원로)를 정비했다. 이 도로에 의해 일본군 기지는 남북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용산은 일본인 중심의 도시화가 진행되었지만, 그 내부에서 지역별로 차이를 보인다. 상대적으로 초창기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구용산에는 조선인 인구가 우세한 곳도 적지 않았다. 한 사례로 1925년의 인구통계를 보면 구용산의 중심인 원정(元町·현재 원효로) 3, 4정목은 조선인 2916명, 일본인 381명으로 비율은 88% 대 12% 정도이다. 그런데 전차 노선에 더 가까운 원정 1, 2정목은 조선인 1234명, 일본인 4138명으로 23% 대 77%이다. 같은 원정인데도 생활의 편의에 따라 민족별 인구 구성이 큰 차이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군용지를 불하하면서 형성된 신용산은 더 극단적이다. 한강통 1, 2정목(현재 한강대로변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에서 신용산역 구간)의 총인구는 1만1534명인데 그중 조선인은 990명으로 10%에도 미치지 못했다.(京城府, ‘京城都市計劃資料調査書’, 1927년)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용산의 일본인 시가지 하면 자연스럽게 신용산 쪽을 떠올렸다. 실제 같은 일본인이라도 구용산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다소 막연하게 ‘신천지’를 찾아온 소상인, 서민층이 많은 데 반해 신용산에는 철도국 관리, 군인, 회사원, 은행원 등 엘리트층이 다수 거주했다. 신용산의 일본인 상류층 주거단지의 대표적인 사례로 “서양식 2층 문화주택 40여 채”로 구성되었다는 삼판통의 조선은행 사택촌(현재 한국은행 후암생활관 자리) 같은 곳을 들 수 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어느 일본인은 훗날 “소학생인 우리들에게 있어 당시의 경성은 일본인들이 모여 살고, 일본어만으로 생활이 가능한 일본의 일부였다”고 회고했다.(‘京城三坂小學校記念文集’, 1983년·삼판소학교는 현재 후암동 삼광초등학교) 비록 어린아이의 시선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선 속의 일본, 경성 속의 일본이었던 용산, 정확하게는 신용산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전해준다고 하겠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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