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지연의 미학
뉴욕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다녀왔다.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 광활한 미술관에는 세계 각국의 유물과 예술품이 모여 있는데 그 수만 약 300만점에 달한다고 한다. 로댕의 조각, 이집트 벽화, 고흐와 한국 화가 박수근의 그림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미술관을 관람한 친구가 물었다. “오늘 본 것 중에 어떤 게 가장 예술적이었어?” 나는 평소에도 좋아했던 모네의 루앙 대성당 그림이라고 대답하려 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림을 마주했을 때, 그 아우라에 잠식되었던 순간이 무척이나 황홀했기 때문이다.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성당의 모습을 그린 연작이지만, 결국엔 빛의 일렁임만 화폭에 남은 것 같은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더 예술적이라 느꼈던 순간을 말하게 되었다. 휴대폰 카메라로 1초면 찍을 수 있을 조각상 앞에 이젤을 놓고서 불편해 보이는 간이의자에 몸을 욱여넣은 채 조각상을 따라 그리고 있던 화가들. 인내심을 가지고 아주 천천히, 잡히지 않을 예술의 진실 같은 것을 구하면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던 사람들. 그들이 가장 예술적이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찍은 동영상은 그들의 그림보다 훨씬 사실적일 것이다. 영상은 조각상의 아주 세부적인 모습까지 정확히 담아낼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그리고 있었다.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미술의 종말을 점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술은 끝나지 않았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등장했을 때, 문학은 영화로 대체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이 있었다. 그런 말들은 여전히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나 문학은 대체되지 않았다.
영상은 현실을 그대로 모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구체적인 묘사라 하더라도 영상 기술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누군가 총을 쏘고 다른 누군가가 그 총에 맞아 피를 흘린다면, 그 장면은 즉각적으로 관객에게 온다. 가히 총을 쏘는 속도로 빠르게 다가온다. 그 광경은 보는 이의 인지가 미처 따라가기 전에 지나가버리기도 한다. 문학은 그런 장르가 아니다. ‘한 사람이 총을 쏜다’라고 쓰여 있다면, 독자는 총의 외관을 상기하면서 총을 쏘는 이의 자세, 방아쇠를 당기는 손의 두께 같은 것을 상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 과정은 즉각적일 수 없다. 한마디로 지연이 생긴다. 대신 하나의 문장은 독자의 수만큼 다양한 광경을 만들어낸다. 읽는 이는 총구 앞에 선 자의 두려움과 긴장을 다 떠안고서야 다음 문장으로 건너갈 수 있다. 그러한 느림의 미학,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새로운 감각과 감정들, 태어나는 낯선 세계들, 그런 것들이 미술과 문학의 명맥을 이어온 힘일 테다.
예술은 우리를 멈추게 한다. 자동화된 몸짓을 중단하고, 흐르는 일상의 시간을 정지시킨다. 찬란한 아름다움이든, 섬뜩한 공포든 대면하게 하면서 우리를 잡아 세운다. 번뜩이는 일격이자 반짝이는 갱신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본질은 어쩌면 찰나의 밀려남이자 잠깐의 늦춤에 있다. 한나절을 할애해서 미술관을 돌아보고 1층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내가 눈여겨보았던 화가는 조각상의 머리칼만을 겨우 완성한 상태였다. 조각상의 결을 올올이 따라 느끼며 그는 작품을 누구보다 섬세히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조각상의 기품을 느릿느릿 베끼면서 그것을 완성하려다 기진했을 몇천년 전의 예술가와 오래도록 대화했을 것이다. 내가 찍은 선명한 영상보다 계속해서 어긋나고 흐려지고 밀려나며 느려지는 붓질이 예술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갔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디지털 매체의 경이로움도 긍정하지만, 속도전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지연되고자 하는 움직임은 조금 다른 결의 예술이 아닐까. 이러한 예술은 살아남으려는 의식 없이도 그저 흐르듯이 이어질 것이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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