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신뢰를 구하지 않는 정부의 불행한 시민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국가별 정부 신뢰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30개국 각 1000명의 국민을 대상으로 작년 말 진행한 이 조사에서 중앙정부를 신뢰하는 편(0에서 10점 척도에서 6~10점)이라고 응답한 한국인 비율은 37%였다. 신뢰하지 않는 편(0~4점)이라고 응답한 한국인 비율 44%를 밑돌았다. 절대적 신뢰도 수치가 OECD 평균(39%)에 비해 크게 낮지 않음에 위안을 삼을 수도 있겠으나 2021년 이뤄진 같은 조사와 비교하면 그 낙폭이 12%포인트로, OECD 평균 하락폭의 5배에 이른다.
신뢰는 단순한 호감도나 국정지지도와 구분되는 개념이다. 사회를 구성해 사는 인간은 타인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외모, 태도, 언어, 행동 등 갖은 단서를 통해 상대방이 나에게 선의가 있는지 그리고 그 선의를 행동으로 옮겨 나에게 이익을 줄 능력이 있는지를 판단하고자 한다. 이를 기초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서면 그 믿음에 기반한 행위가 따르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기 피해자들이 방증하듯 악의를 숨긴 상대방의 처분에 취약해진다. 결국 신뢰는 상대방의 의도와 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를 기반으로 내가 상대방에게 해를 입을 위험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떻게 선의와 능력을 보여 신뢰를 높일 수 있을까? 이번 OECD 조사에선 정부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요인들도 분석했다. 세대 간 이해의 균형 잡힌 조절, 증거에 기반한 의사결정,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낼 기회의 보장, 그리고 의회의 정부 견제. 정부 신뢰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들을 보고 있자니 윤석열 정부 들어서 급락한 정부 신뢰도가 새삼 놀랍지 않다. 대선 후보 시절 30대 장관을 많이 내겠다고 공언한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평균연령 60대의 내각을 꾸렸고 극우에 경도된 현실인식을 반복해 드러내며 청년층에 외면당했다. 연구·개발 예산 삭감,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등 사회적 파장이 컸던 정책들을 결정한 근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반대의견엔 입틀막으로 대응했고 비판적 언론은 집요하게 탄압했으며 대중과 언론이 직접 질문을 통해 답을 구할 기회는 없애다시피 했다. 또한 헌정사상 가장 빈번한 거부권 행사로 의회의 견제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켰다.
더 큰 문제는 현 정부의 국정운영에서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선 참패 이후에도 뚜렷한 국정기조의 전환 없이 극우적 언행으로 물의를 빚은 인사들을 계속 중용하고 있다. 해병대원 사망사건 수사 개입,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등 정권 차원에서 받는 주요 의혹에는 며칠 지나 모순이 드러나는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진상규명 절차를 차단하는 식으로 대응해왔다. 여론의 지지와 신뢰를 동력이자 자산으로 삼는 정치 지도자보다는 법리만 잘 구성하면 원하는 판결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검사의 인식에 가깝다. 취임 초 지지율은 의미가 없다고 한 발언 그대로 현 정부는 시민의 평가에 무감해 보인다.
신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지도자를 둔 시민은 불행하다. 의도나 능력에 대해 긍정적 기대를 할 수 없는데 지도자의 자의적 통치행위에 노출되는 취약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코로나19 시국에서 역학조사,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 두기, 백신 접종과 같이 불편과 위험이 따르는 일에도 시민들이 원활하게 협조한 것은 질병관리당국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연금개혁, 세제 개편, 저출생 대책 등 첨예한 사회적 갈등이 명백한 국정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을 대의나 공공선 같은 명분 속에서 시민들이 받아들이는 일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정부가 나의 삶과 생각에는 무관심하다고 확신한 시민의 선택지는 좁다. 절망이나 냉소 속에 각자도생을 모색하거나 주권자가 보내는 신뢰를 받들 대안을 찾아 나서거나.
송환석 퍼듀대 커뮤니케이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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