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모눈종이의 꿈
부동산 직거래 커뮤니티를 자주 들여다본다. 집을 살 만한 형편은 아니지만 내 집 마련의 꿈이 없지는 않다. 물론 한동안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물부엌(간단한 조리와 빨래 등 물 쓰는 일이 가능한 보조적 공간)이 딸린 문간방에서 시작해 반지하, 셰어하우스, 고시원, 옥탑방을 거쳐 다가구주택의 투룸 월세살이가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보금자리 여정이다.
주거빈곤가구의 고충을 표현하는 ‘지옥고’를 두루 거치면서도 나는 그때그때 그 공간을 마련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반지하에서 셰어하우스로 옮길 땐 지상으로 올라온 것만으로도 기뻤고, 고시원에서 옥탑방으로 옮길 땐 방에서 세 발짝 이상 떼어 걸을 수 있는 데다 창을 열어 바깥공기를 쐴 수 있는 것에 더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림잡아도 ‘억’ 소리 나오는 월세 부담 속에서 ‘내 집 마련’은 ‘남의 집’ 얘기였다. ‘영끌족’도 어느 정도 모아둔 자금이 있고, 여기에 보태 대출받을 수 있을 만큼 처우가 괜찮은 대도시 직장인들에게나 해당한다. 집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행여 월세 올리겠다는 말이 나올까 봐 가급적 집주인과 마주치는 일을 만들지 않는 정도.
지난 6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아주 오래된 미래도시>는 ‘내 집’에 대한 감각을 건드렸다. 영화는 도시 재개발과 도시 재생이라는 두 개념이 충돌하는 인천의 원도심을 비춘다. 그 가운데 재개발 예정구역으로 지정돼 이웃들이 하나둘 떠나고 ‘철거’ ‘붕괴 위험’ ‘책임 안 짐’과 같은 경고 글귀가 뻘겋게 휘갈겨진 동네에서 떠날 날을 유예하고 있는 노부부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40여년 전 대문 위로 휘어지는 등나무가 얼마나 예쁘게 꽃을 피우는지 누가 먼저 사겠다고 나선 것을 계약금을 배로 치러 장만하게 됐다고 내 집 마련의 순간을 회상했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만큼의 세월을 함께하는 동안 두 사람은 있는 정 없는 정 다해 가꾼 이 집에서 해로하는 삶을 꿈꿨으니 그들에게 재개발은 기꺼운 소식이 될 수 없었다.
영화 프레임이 인천 원도심의 차이나타운, 근대건축물을 되살려 쓰는 공간들, 일본의 도시재생 사례로 넘어가는 동안에도 내게는 노부부가 잔상으로 남았다. 그간 나는 서울은 애초에 포기한 채 서울과의 접근성을 고려해 KTX 정차역이 있는 지역, 당장은 돈을 빌려야겠지만 일반적인 정년 시기까지 내 노동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액수를 기준 삼아 집을 찾았다. 내 딴에는 입지와 비용 외에 내 생활패턴을 충족시키는 주변여건을 고려한다고 했지만 노부부가 찾은 집과는 결이 달랐다.
노부부가 처음 그들의 집을 장만했을 때의 집은 앞으로의 삶이 그려지고, 그 삶을 기꺼이 의탁할 수 있는 곳이었으리라 충분히 짐작됐다. 반면 지금의 나는 어쩌다가 조건에 맞는 매물을 발견해도 마음이 막 동하지 않는다. 수리가 반드시 필요한 집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봐야 할지 가늠하지도 못한다. 나는 이것이 내가 그곳에서의 삶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 집을 장만할 때부터 팔게 될 때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따지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를 살아내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은 무력해졌고, 내 집에 대한 감각은 무뎌졌다. 그리하여 애써 현실에 내 삶을 끼워 맞추고 있지 않았는가.
중학생 때 기술 수업 시간에 주택 도면을 그리는 단원이 있었다. 당시 선생님께선 훗날 각자 살고 싶은 집을 설계해보라고 하셨다. 기술적으로 말이 되든 말든 꿈에 부풀어 몇날며칠이고 선을 그렸다 지웠다 하며 도면을 그려댄 기억이 또렷하다. 영화관에서 나와 문구점으로 향했다. 모눈종이 한 묶음을 샀다. 세상물정 모르고 꿈에 젖는 일이면 좀 어떤가. 자꾸자꾸 그려보자고 다짐한다.
도시 재개발이냐, 도시 재생이냐를 다투기에 앞서 어쩌면 이 도시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필요한 것 역시 저마다 내 집에 대한 감각을 살리는 일일지 모르겠다. 살고픈 집, 그 집에서의 삶을 그릴 수 있을 때 그 그림을 마을로, 도시로 확장시킬 수 있지 않을까.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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