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도설] 장마 아닌 장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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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인데다가 창문까지 거적대기로 가리어서 방안은 굴속같이 침침했다. ()천장에서는 쉴 사이 없이 빗물이 떨어졌다. 빗물 떨어지는 자리에 바께쓰가 놓여 있었다. 촐랑촐랑 쪼르륵 촐랑." 부산 동래를 배경으로 6·25 전쟁 이후 암울한 시대상을 그린 손창섭의 소설 '비 오는 날' 한 대목이다.
부산에서 1시간 최다 강수량 1위를 기록한 2008년 8월 13일 무려 106㎜가 쏟아졌는데, 이때는 이미 장마(6월 17일~7월 26일)가 끝난 지 보름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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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인데다가 창문까지 거적대기로 가리어서 방안은 굴속같이 침침했다. (…)천장에서는 쉴 사이 없이 빗물이 떨어졌다. 빗물 떨어지는 자리에 바께쓰가 놓여 있었다. 촐랑촐랑 쪼르륵 촐랑.” 부산 동래를 배경으로 6·25 전쟁 이후 암울한 시대상을 그린 손창섭의 소설 ‘비 오는 날’ 한 대목이다. 글을 읽다 보면 월남한 청춘의 우울함과 암담함을 왜 눅진한 장마에 빗댔는지 알게 된다. 오죽하면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장마를 ‘나이 많은 아내의 잔소리 같다’고 했을까. 하지만 문학작품이나 유행가 가사에 담긴 장마의 전형적 이미지가 현실 세계에선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요즘 장마 앞에는 ‘도깨비’ ‘스텔스’ 같은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장마는 추적추적, 자주, 끊이지 않는 비가 특징인데 최근엔 갑자기 나타나 사람을 놀래키는 도깨비나 비행체처럼 느닷없는 집중호우가 예사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마른 장마’가 있는가 하면, 여름철보다 더 많은 비를 뿌리는 ‘봄 장마’ ‘가을 장마’도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부산에서 1시간 최다 강수량 1위를 기록한 2008년 8월 13일 무려 106㎜가 쏟아졌는데, 이때는 이미 장마(6월 17일~7월 26일)가 끝난 지 보름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고 보니2014년 동래 우장춘로 지하차도 침수는 8월말이다.
6월 22일 시작한 남부지방의 장마가 지난 27일 끝났다고 기상청이 공식 발표했다. 부산의 경우 총 36일 장마 기간 중 강우일로 기록된 날은 22일이다. 그러나 이중 열흘은 1㎜ 안팎으로, 비다운 비는 12일이었다. 문제는 일단 내렸다 하면 퍼붓기 일쑤였고, 지역 내 편차도 컸다는 점이다. 지난 24일 밤 비의 양은 중구 대청동 기준 176.3㎜로, 1시간 최다 강수량(83.6㎜)으로는 부산의 기상 관측 사상 9번째 기록이다. 그러나 동구(153.8㎜) 영도구(150.5㎜) 등 서부산과 금정구(11.5㎜) 기장군(14㎜) 등 동부산의 강수량이 완전히 달랐다. ‘마른 장마’에 가까웠던 남부지방, 물난리로 고통을 겪은 중부지방과 비슷한 양상이다.
우리나라가 장마보다 우기, 소나기보다 스콜이 흔한 아열대 기후로 변해가는 징후는 날씨만이 아니다. 경남 밀양이던 사과 재배지가 강원도로 상승하고 블루베리 바나나 레몬은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어디서든 잘 자란다. 장마 전선이 물러났다고 비마저 끝난 건 아니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 언제 어디서 쏟아질지 모른다. ‘지리한 장마가 끝났다’는 표현이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처럼 장마 예보 자체가 의미 없어질 때가 머지 않았다.
강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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