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산 넘고 물 건너는 한국어[한성우의 말과글의 풍경]
학문·언어 교류 가능성 환기시킨
동아시아한국학 국제 학술대회
영화 ‘방가방가’ 출연했던 발표자
인도네시아 K팝 팬들 SNS 분석
Oppa·Eoni·daebak 등 구사하고
BTS의 Suga는 Agus로 현지화
여러 언어 혼합 ‘코드 스위칭’ 흔해
K팝 가사 속 ‘알라뷰’ ‘베이비’
꼰대의 시각으로만 봐선 안 될 것
한국어가 국제어가 될 수 있을까?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두가 한글로 쓴 글을 읽고 오로지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까? 과거나 현재에 그런 적이 없고 미래에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있으니 ‘한국학’ 관련 국제학술대회에서는 가능하다. 일찍이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대한민국 인천 소재의 한 대학으로 유학 와 학위를 받고 돌아간 이들 중 60여명이 각 나라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들 중 20명이 모교의 개교 70주년을 기념해 한국학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오로지 한국어로 읽고 쓰고 말한다.
20여년 전 교정의 추억을 그가 전공한 시적 언어로 말하는 이, 고향의 친정집에 부모님이 계시지만 또 하나의 친정집에 대한 옛이야기를 정겹게 들려주는 이도 있다. 한국어 규범에 따른 중국식 발음의 이름이 있지만 한국식으로 발음하면 다소 어색한 이름일지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지극히 한국적인 설화 속 주인공인 ‘불가살이’에 대해 발표하면서 불가살(不可殺)의, 즉 지우려 해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한국학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는 이도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동아시아 전역을 회유하던 지식과 지식인, 언어와 문학, 역사와 철학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한국학의 미래 비전을 제시한다.
동아시아한국학과 아시안 하이웨이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는 국경이 없다. 이웃집 드나들 듯 걸어서도 다른 나라를 오갈 수 있는 유럽과 달리 우리의 국경은 넘으려면 깊은 물에 빠지거나 총알이 빗발치는 그런 것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외국은 멀고 외국어는 낯설어 우리의 언어, 문학, 역사, 철학에 대한 연구와 교육은 좁은 우물 안에 갇히기 십상이다. 그러나 일찍이 ‘동아시아한국학’을 표명하며 국내외의 학자들이 모여 연구와 교육에 매진한 결과 한국학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학술대회에 참여한 이들 또한 동아시아한국학을 공부한 이들인 동시에 이제는 동아시아한국학 관련 교육과 연구를 이끌어가는 이들이다.
이들은 동아시아의 국경을 넘나들던 언어와 사상에 대해 말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20세기 초의 동아시아, 그러나 량치차오(양계초)가 일본에서 원고를 쓰면 상하이에서 인쇄가 됐고 그것이 인천으로 수입돼 널리 읽혔다. 중국 땅에서 만난 여운형과 호찌민(호지명)은 각각 영어와 프랑스어로 의사를 소통하며 자국과 세계의 운명에 대해 논했다. 애국계몽운동에 매진하다 연해주와 중국을 주유하던 장지연이 새로운 시대의 언어를 익히지 못한 채 필담에만 의존하다 끝내 뜻을 펼치지 못하고 낙담한 사연을 들려준다. 그것이 먼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오늘날에도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문제임을 환기시킨다.
주자의 소학(小學)이 한·중·일 삼국에서 어떻게 유통되고 재생산되었는가에 대한 논의, 조선의 반도체라 일컬어지는 홍삼이 당대의 한국과 중국을 어떻게 연결시켰는가에 대한 발표는 사상과 물자 교류의 오늘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한때 동아시아의 공통문자였던 한자가 지금도 한·중·일 삼국은 물론 베트남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혀 언어교류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나아가 토박이 한국인에게도 어려운 ‘은/는’의 용법 및 이동과 관련된 표현에 대한 연구는 한국어 연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의 동아시아한국학 관련 발표를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학문의 아시안 하이웨이를 떠올리게 된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보이는 ‘아시안 하이웨이’는 아시아 전역을 잇는 고속도로이지만 한반도의 북녘땅이 막혀 있는 지금에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유라시아는 하나의 대륙이고 육로를 통해 어디든 갈 수 있다. 트럼프와 북·미 회담을 하기 위해 기차로 하노이까지 간 김정은 위원장의 여로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육로로 연결된 땅, 그리고 가까운 섬이다. 일본을 포함해 이 모든 나라가 한국어와 한국문화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트랜스 랭귀지와 코드 스위칭
영화 <방가방가>에서 열연한 배우이자 인도네시아의 도서 지역 소수 언어 연구자의 발표는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발표 주제는 인도네시아 K팝 팬들의 소셜미디어에서 나타나는 코드 스위칭 양상이다.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졸업 후 한국에서 유학해 한국어학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네덜란드에서 유학해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이다. 동서양을 주유하던 그의 학문적 이력을 따라 발표도 한국어, 인도네시아어, 영어를 넘나들며 말 그대로 ‘트랜스 랭귀지(Trans Language)’와 ‘코드 스위칭(Code Switching)’의 전형을 보여준다.
공용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가 있지만 수만 개 섬으로 이루어져 언어 지형이 매우 복잡한 인도네시아는 다언어 국가일 수밖에 없다. 한 언어를 쓰다 다른 언어를 쓰는 언어 전이와, 그리고 한 맥락 또는 한 문장에서 여러 언어의 어휘와 표현이 뒤섞이는 부호 전환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들이 K팝을 접하게 되면서 인도네시아어는 물론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인도네시아어처럼 바뀐 한국어가 사용되는 양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우리의 ‘오빠(Oppa)’와 ‘언니(Eoni)’는 인도네시아어와 함께 자연스럽게 쓰이며 ‘대박(daebak)’과 ‘짱(jang)’은 물론 방탄소년단 ‘슈가(Suga)’의 철자를 거꾸로 써 인도네시아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아구스(Agus)’도 굳어졌다.
그런데 이 발표를 들으며 문득 ‘고려가요를 부르는 방탄소년단’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라고 노래하다 뜬금없이 ‘얄리얄리얄랑성’을 반복하는, 가신 님에 대한 서러움을 노래하다 갑자기 “위 증즐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외치는 그 고려가요를 방탄소년단이 부른다고? 방탄소년단뿐만 아니라 아이돌들이 부르는 노래에 대한 시각은 결코 곱지 않다. 꼬장꼬장한 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맥락 없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듯한 가사, 시도 때도 튀어나오는 ‘알라뷰’와 ‘베이비’가 좋게 들릴 리가 없다. 그런데 어쩌랴 이런 가사의 노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으니.
생각해보니 언어에 대한 ‘꼰대’들의 생각이 틀렸다. 트랜스 랭귀지와 코드 스위칭이 없었으면 과연 K팝이 이 정도의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오로지 우리말로 우리만 알 수 있는 정서를 담아 재미없게 가사를 쓰고 느려터진 리듬에 뻔한 멜로디에 얹었으면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얄리얄리얄랑성’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후렴구가 노래의 맛을 살린 반면 뜬금없는 ‘태평성대’가 노래의 맛을 죽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찰떡의 소처럼 촘촘하게 박힌 저런 가사들이 트랜스 랭귀지와 코드 스위칭의 기능을 하며 자연스럽게 세계인의 가슴을 움직인 것이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법
국제학술대회의 또 다른 백미는 동아시아한국학의 문을 연 원로 교수의 특강이었다. 강의의 제목은 봉산개로우수첩교(逢山開路遇水疊橋), 동아시아의 공통문자로 된 제목이기에 참가자 모두가 ‘산을 맞닥뜨리면 길을 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다’는 뜻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다.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 일행이 달아나는 길마저 산과 물에 막혀 좌절할 때 조조가 한 말이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에 중국 대표와 협상하다 교착상태에 이르렀을 때 한 말이기도 하다.
한국어와 한국학은 늘 산을 맞닥뜨리고 물을 만나왔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붙은 자그마한 반도에 국한된 영토, 많지 않은 인구에 수없이 많이 겪은 침략의 역사는 상존하는 산과 물이었다. 20세기 초반 35년간 경험한 일제의 지배, 1950년에 시작돼 3년간 지속된 혹독한 전쟁, 그리고 그 이후의 아슬아슬한 분단 상태, 뭐 하나 순탄할 것이 없는 역사의 연속이다. 세계에서 열두 번째 혹은 열세 번째의 사용자 수를 가진 한국어이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에 바탕을 둔 한국문화라지만 주류의 언어와 주도적인 문화가 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한국어학을 비롯한 한국학, 그리고 한국문화를 알리려는 학계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한국학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당연히 한국이고 이 나라 최고의 학자가 한국학 분야의 최고인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을 세계에 알리려면 그들의 언어로 논문과 책을 써야 하지만 한국학 연구자들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한국어와 한국학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세계 속으로 가기 위한 길과 다리는 노력에 비해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삽과 망치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길 내기 작업에 중장비를 이용한 듯한 효과가 나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우리의 문화적 저력에 바탕을 둔 이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우리의 노래, 드라마, 영화가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에쵸티’와 ‘욘사마’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학 연구자가 된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이 귀국해서는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에 대해 논하고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에 대해 연구하기도 한다. 산을 통과하는 터널이 뚫리고 물을 건너는 대교가 건설되는 순간이다.
이번 학술대회 참가자 중 상당수는 7년간의 BK사업과 9년간의 HK사업 수혜자들이다. 차례로 대학원생과 인문학연구 지원사업인데 사업 수행과정에서는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사업이 외국인을 지원하는 데에 쓰이는 것에 대한 뒷말이 많았다. 그러나 짧은 기간의 지원이었지만 60여명의 길과 다리가 해외에 닦이고 놓인 것을 생각하면 그 수혜 대상에 국경을 가릴 이유가 없어 보인다.
한국어와 한국학의 앞에 여전히 산과 물이 보인다. 한국문학의 번역이 전무하다시피 하던 일본에서 비교적 많은 번역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의 확산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한·중관계가 경색되면서 중국의 한국학 관련 붐이 식어 중국 유학생이 급감하고 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나아가 동유럽으로의 확장을 통해 진정한 한국학의 아시안 하이웨이를 완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그에 대한 지원은 미미하다. 그러나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러한 연구자들은 여전히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있다.
■필자 한성우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한성우 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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