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자고로 가족 일에 둔감해야 리더다
왜적에 맞선 순신의 셋째 아들 면
수적 열세에도 맹렬하게 싸웠지만
왜적 세명을 처치하고 전사한 이면
전사 소식에 목 놓아 통곡한 순신
3일장 치르고 일상 업무로 복귀해
셋째 아들의 죽음을 뒤늦게 알았다. 살이 뜯기고 골수가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다를 호령하던 이순신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도 한명의 아버지였다. 하지만 속을 드러낼 수 없었다. 왜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이는 이순신의 아들만이 아니었다. 자고로, 리더는 이순신처럼 가족의 일에 속을 드러내선 안 된다. 지도자들의 부인 일로 시끌벅적한 요즘, 이순신의 인고가 새삼 아프게 다가온다.
왜군과 마주친 이면은 "너희들 중에 통역이 있거든 나서라"고 외쳤다. 말 탄 적장이 통역의 입을 빌어 "네가 누구냐? 혹시 이순신의 아들이냐?"라고 물었다. 이면은 단호하게 답했다. "오냐, 내가 이순신 제독의 아들이다. 너희들이 비열하고 야만적으로 민가에 분탕질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기에 나섰으니 어서 덤벼라!"
그러자 장수 한명이 앞으로 나와 "네가 항복을 하면 살려줄 것이며, 가족 또한 데려다가 평안히 살게 해주겠다!"라고 응수했다. 이면이 크게 웃으며 칼을 겨눴다. "내가 항복할 듯싶으냐? 잔말 말고 내 칼을 받아라!"
좌우에 있던 적병들이 이면에게 달려들자 적장은 소리를 질러 멈추게 했다. 그는 흑전장정 휘하의 검객이었다. "오냐, 네 뜻이 장하다. 네가 갑옷과 투구를 아니 입었으니 나도 갑옷과 투구를 벗고 겨루겠다." 이면과 적장이 서로 말을 달려 "쨍"하며 일합一合을 겨루자마자 왜군과 백암리 의혈청년들과의 혈투도 시작됐다.
일각(15분) 만에 적장이 이면의 칼날에 목숨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이면은 이어 다른 장수 2명을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렇게 적과 싸우다 이면은 왼편 어깨에 탄환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면 일행은 수적 열세에도 맹렬하게 싸웠으나 결국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1597년 10월 중순에 벌어졌던 이 사건은 200년이 지난 1796년, 정조 즉위 20년 때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당시 직제학이던 서유방徐有防은 임금에게 "이순신의 막내아들 면이 적을 쳐서 세 적장을 사살하고 적에게 죽임을 당했거늘 아직 표창이 없으니 실로 흠이 되는 일입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남인 출신 영의정 채제공蔡濟恭도 "이순신이 통제사 시절에 그 아들 면이 고향 집에 있다가 적 한 부대를 맞아 적장 셋을 죽이고 본인 또한 죽으니 당시에 총각이라 참으로 충무의 아들이라 할 것입니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후 정조는 이면을 이조참의로 증직했다.
아들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던 이순신은 남해안 쪽으로 진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서 눈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세게 불자 법성포에서 5일간 머물렀다. 호남일대에는 적의 함선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10월 8일 어외도로 진을 옮겨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에도 남쪽으로 이동해 해남의 전라우수영으로 돌아왔는데,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참혹한 상태였다. 하지만 해남 육지에서는 여전히 왜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순천부사 우치적에게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해남읍에 들어가 적을 소탕하고 치안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영이 함대를 감춰둘 만한 장소는 아니라고 보고 여러 장소를 검토했다. 10일은 폭풍우 때문에 출항하지 못했다. 11일 안편도를 골라 여러 장수를 대동하고 육지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주위를 살펴보니, 예상대로 적합한 장소였다.
함대를 정박하고 군무를 보던 이순신은 14일에는 새벽 2시쯤에 깨어났다. 꿈 때문이었다. 자신이 타고 가던 말아 발을 헛디뎌 냇물에 빠졌는데, 이상하게 자신은 거꾸러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아들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전날 밤에는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이순신이었다. 공무를 마치고 저녁이 되자 이름을 잘 모르는 천안 사람이 와서 집에서 보낸 편지를 전해줬다. 조선 바다를 호령하는 천하의 이순신도 이때는 겉봉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급히 겉봉을 뜯어보니 그 속의 봉투에는 둘째 아들 열䓲의 필체로 쓴 두 글자의 단어가 보였다. '통곡慟哭'.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곳 없다지만, 셋째 아들은 자신의 뒤를 이를 무장이 될 것이란 기대가 컸던 만큼 슬픔 또한 컸다. 이순신은 목 놓아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오직 울부짖을 뿐이었다. 하늘도 통곡했는지 바다 위에, 땅 위에, 판옥선 위에 눈물을 쏟아냈다.
안편도. 이순신에게는 편안하지 않은 섬이었다. 셋째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곳이다. 슬픔과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이 이순신뿐만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휘하 장졸들 앞에서 슬픈 모습을 보일 수도 없었다.
사흘 만에야 영내에 있는 강막지의 집을 빌려 통곡하고 3일장을 지냈다. 그리고 10월 19일부터 치안 유지, 왜적 관련자 체포, 둔전 관리 등 일상 업무를 시작했다. 김신웅의 아내인 이인세와 장억부가 잡혀 들어왔고, 왜적에게 붙었던 자 2명도 체포됐다.
골수가 쏟아질 지경의 슬픔을 품었던 탓인지, 무리를 했던 탓인지 저녁에는 코피가 터져 1되(1말의 10분 1·1말=18L)나 넘게 흘렸다.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아들은 죽은 영혼이 됐으니 이렇게 불효를 저지를 줄 어찌 알았겠는가. 마음이 슬프고 찢어지는 듯이 아프다. 비통함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순신은 마르지 않은 일기장을 그대로 덮었다.
다음날, 이순신은 김종려에게 감자도감검 직책을 맡겨 소음도 등 13개 섬의 염전을 관리·감독하도록 했다. 22일엔 조정과 의정부에서 보낸 신기룡 등 3명의 관리에게 임금의 분부와 방문(수배 전단)을 받았다. 칠천량과 명량전투에서 도주하거나 적에게 붙어먹었던 지방 관리들을 체포하거나 처형하라는 문서였다.
이날 김득남이 전라우수영에서 처형됐고, 무안현감 남언상을 비롯 윤해, 김언경 등은 전라우수영의 군관들에게 체포됐다. 김언경은 다음날 처형됐다. 그 무렵인 10월 24일, 순천부사 우치적 등이 이끄는 장졸들이 해남에서 적의 군량 322석을 탈취해 배에 싣고 왔다. 군량 확보에 힘쓰던 때라 이순신에겐 참으로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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