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의 시간, 1/N의 책임 [세상읽기]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뉴스를 접할 때마다 기시감이 든다. 김규현 변호사가 공개한 카카오톡 대화나 통화 내용은, 2016년 이화여대 학내 사건으로 촉발된 ‘정유라 특혜 의혹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2016년 여름, 이화여대 학생들의 교내 시위 출발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최경희 당시 총장이 경찰을 교내로 불러들여 강제 해산을 시도하면서 분노한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여야 국회의원실과 유관기관에 2천건이 넘는 민원과 감사요구서를 제출했는데, 그중에 정유라에 대한 특혜 의혹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해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공론화되었고, 결국 정유라에게 제공된 ‘삼성의 세마리 말’은 ‘최순실 국정농단’의 증거이자 뇌물로 대법원에서 최종 인정되었다. 대학생 정유라에 대한 출결과 학점 특혜 의혹이 ‘삼성의 세마리 말’에 이르기까지, 무관한 듯 보였던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연결되었고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의 다양한 증언과 제보가 뒤섞였다.
지금 김규현 변호사가 공개한 카톡방을 둘러싼 사태 전개도 비슷해 보인다. 참여자 각각에 대한 새로운 의혹들이 꼬리를 물고 있고 관련 의혹을 제보하거나 고발하는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한다. 이 사태의 결말이 어떻게 나올지, 얼마나 긴 과정을 거쳐 종착점에 이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열차는 출발했고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대통령이나 대통령 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에서, 경찰에서, 행정 부서나 기관에서, 민간에서,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엉킨 실타래의 한끝씩 듣고 본 사람들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 전에 몇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대통령과 그의 사람들은 그 기회를 번번이 걷어찼다. 2016년 여름부터 촉발된 그 사태가 기실 2014년 ‘세월호 사건’에서 시작해 2015년 겨울 ‘정윤회 비선 실세 의혹’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잘못된 대응이 누적된 결과였던 것처럼, 지금의 사태도 대통령과 그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태의 책임을 묻는 것으로 충분할까? 76만5천명의 정부 공무원들이 657조원의 예산을 들여 당장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은데, 이런 상태에서 일이 제대로 굴러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지 않았더라면 국회가 마땅히 처리해야 했을 중대 사안들도, 앞으로 계속 제기될 의혹을 푸느라 우선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높다.
기왕 사태가 이렇게까지 온 건 어쩔 수 없다 치자. 우리가 왜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 각자 선 자리에서 함께 복기해야 할 시간이다. 볼테르의 말대로, 역사가 스스로 반복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반복을 하는 것이다. 그가 최소한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 없이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국정운영 능력이 없는 대통령에게 그 자리를 허락하게 되었을까?
‘지난 대선에서 그를 찍은 사람들이 문제’라거나 ‘내가 찍기는 했지만 저럴 줄은 몰랐다’는 식의 답은, 이런 불행한 사태를 또다시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난 대선에서 그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 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왜 소수가 되었는지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저럴 줄은 몰랐다’는 사람은 왜 몰랐는지에 대해 함께 복기해봐야 한다. 우리가 가진 어떤 시스템이, 제도가, 혹은 문화가 ‘저럴 줄 몰랐던 사람’을 두번이나 선택하게 만든 건 아닌지 말이다. 집권당 정치인들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대한민국의 책임 있는 양대 정당 중 한 정당이 왜 두번이나 실패한 대통령 후보를 내놓게 되었는지, 혹은 집권 이후 실패로 가는 길을 견제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이제는 공론화를 해볼 시간이다. 당시 윤석열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어준 지금의 제1야당이자 직전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책임은 말할 나위도 없겠다.
지난번 우리는 너무 쉽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검사들이 국정농단 책임자들을 찾아내 처벌하도록 막대한 권한을 위임해주고 새로 들어선 정부엔 정체 모를 ‘적폐청산’의 과제를 던져주면 사태가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 지금 두번째 불행을 가져온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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