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재난’ 대응, 정부의 역주행 [뉴스룸에서]

이정훈 기자 2024. 7. 31. 19: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와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등 환자단체 회원들이 지난 7월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집회를 열어 의사 집단휴진 철회와 재발방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이정훈 | 사회정책부장

한국에 ‘재난’이 닥쳤다. 5개월이 넘었다. 지난 2월23일 정부는 보건의료재난 위기경보를 ‘경계’에서 최고 수준인 ‘심각’ 단계로 올렸다. 보건의료체계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거나 국가의료 붕괴가 발생했을 때 발령된다. ‘심각’은 코로나19 대유행 시절 때의 단계다. 흑사병만큼이나 세계사에 큰 전환점이 됐던 코로나19 대확산 때와 비슷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다. 그나마 당시엔 일상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대처할 수 있었다. 차차 백신이 개발돼 불안감도 줄었다.

반면 이번 재난은 갈수록 암담해지고 있다. 암 진단을 받고도 언제 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지 몰라 환자와 그 가족은 발을 동동 구른다. 정기 건강검진에서 뇌혈관 이상 진단을 받아 서둘러 대형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수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동료도 있다. 환자가 환자이기 어려운 시대다. 혹여 아프면 돌봐줄 의사가 없을까 봐 멀쩡한 이들도 전전긍긍한다. 오죽하면 “아프면 안 된다”는 인사말이 나오겠는가.

재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불공평하다. 사회적 약자가 더 피해를 보고 회복도 더디다. 2021년 화재로 죽거나 다친 장애인은 인구 10만명당 9.1명으로 비장애인의 2.2배였다. 2022년 8월 서울에 내린 폭우로 침수된 관악구 반지하 방에서 장애인 가족 세명이 탈출하지 못해 목숨을 잃은 것도 재난의 불평등을 보여준다.

2024년 의료재난도 환자와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다. 최근 전북 익산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70대 노인이 한쪽 발목이 절단되는 큰 중상을 입었는데 수술할 의료진을 찾지 못해 끝내 숨졌다. 충남대병원은 8월부터 응급실을 단축 운영할 계획이다. 다른 지방 대학병원들도 같은 움직임을 보일 태세다. 급기야 이달 초 환자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길거리에 나와 ‘의료공백을 해소해달라’고 호소했다.

6개월째 이어진 의료공백이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일로다. 언제 해결될지 알 수 없다. 전공의들이 환자를 붙들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데, 스승인 의대 교수들은 사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이들을 감싸기에 급급하다. 정부는 한술 더 뜬다. 해결책이라고 내놓는 대책은 ‘필수·지역의료 강화’라는 애초 사건의 발단이 된 의대 정원 확대 취지를 되레 훼손하는 것이었다. 교육부는 바꿀 수 없다던 의대 정원 2천명 증원을 국립대 총장들의 건의를 핑계 삼아 조정했는데, 결국 지역의료 정상화의 중추가 될 지역 국립대 의대 정원만 줄였다. 보건복지부는 결원을 메우겠다며 하반기 전공의 모집에 나섰지만 지역·전공 제한을 없앴는데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겨우 수도권 인기과의 공백만 조금 줄어들 판이다. 그러곤 별다른 대책이 없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국회에서 의료공백 해소 방안을 묻는 말에 그저 “더욱 설득하겠다” “더욱 노력하겠다” 등의 답변만 반복했다. 더는 내놓을 대책이 없음을 자인한 것이다.

정부는 의료재난을 심각 단계로 격상했으면서도 대응은 역주행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4월 초 박단 전공의 대표와의 만남을 끝으로 이렇다 할 메시지를 내지 않고 있다. 그사이 아리셀 화재에도, 호우 경보에도, ‘티메프’ 사태에도 메시지를 냈지만, 환자 피해가 이어지는 의료재난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61차례 열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 본부장인 한덕수 국무총리도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는다. 그는 6월16일 중대본 회의를 주재한 이후 등장하지 않고 있다. 본부장 바로 아래 1차장을 맡은 조규홍 복지부 장관, 2차장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이한경 행안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이 번갈아가며 회의를 주재할 뿐이다. 7월 말부턴 마땅히 내놓을 대책이 없다며 주 2회 열던 회의와 브리핑도 각각 주 1회로 줄였다.

환자들이 “이게 나라냐”고 힐난해도 정부로선 달리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헌법 제34조 6항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헌법 준수’는 대통령의 첫번째 임무다. 윤 대통령은 스스로 노동·교육·연금개혁과 함께 강조한 의료개혁이 하나둘 퇴색하는 상황에서, 의사를 설득하고 의료 재난을 해결하는 최선두에 서야 한다.

ljh9242@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