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거짓말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그림 속에 서로를 부드럽게 감싸안은 채 짙은 붉은색 소파에 앉아 있는 남녀가 보인다. 풍성한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 무릎에 앉아 그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고, 남자는 눈을 감고 조용히 듣고 있다. 19세기 후반 인테리어 풍으로 꾸며진 방안, 노란색과 분홍색 줄무늬 벽지를 배경으로 놓여 있는 테이블과 의자도 여자의 드레스와 마찬가지로 새빨갛게 채색돼 있다. 작품의 제목은 ‘거짓말(Le Mensonge)’이다. 우리말에서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거짓말’을 묘사한 그림에서 시각을 자극하는 강렬한 빨간색이 주된 색채를 이루고 있다는 게 다소 재미있는 우연으로 느껴진다.
'거짓말'이라는 제목이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그림 속 남녀 중 누가 무슨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일까? 누군가 바람을 피우고 있나?
이 작품은 남녀 관계에서의 사랑과 속임수를 탐구한다. 숙녀는 연인의 품에 안겨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드러내고, 신사는 그녀에게 매혹된 듯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얼핏 보기엔, 애정 어린 포옹을 통해 한 커플의 사랑과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단순히 내밀한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에로틱한 묘사가 아니다. 화가는 ‘거짓말’이란 미스터리한 제목을 통해, 관람자에게 보이는 것 이면의 진실, 인간관계의 복잡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유도한다. 사랑은 가슴 뛰고 아름다운 감정이지만, 동시에 기만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화가이자 판화가인 펠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 1865~1925)은 뛰어난 색채 화가이자 매우 독창적인 목판화의 거장이다. 미술사에서 발로통은 반 고흐, 앙리 마티스,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동시대 예술가들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발전시킨, 그 시대의 가장 개성이 뚜렷한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1890년대, 발로통은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가 참여한 나비파(Les Nabis)에 합류했다. 나비파는 폴 고갱의 평평한 색면, 단순한 색상, 짙은 윤곽선 등 장식적인 스타일과 일본 목판화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양식을 발전시킨 20세기 초 프랑스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이었다. 그들과 함께 활동하는 기간 동안, 나비파 양식으로 파리의 진보적 신문과 잡지에 실린 반권위주의적이고 반부르주아적인 삽화로 이름을 날렸다. 발로통은 쥘 르나르의 유명한 작품 ‘홍당무’ 등 대중 소설의 삽화로도 유명하다.
발로통은 파리 거리의 모습이나 무대 같은 실내 장면, 정물화, 풍경화, 누드화, 초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업을 했다. 그의 그림에서는 일관된 예술적 양식의 특징을 집어내기가 어렵다. 발로통은 특정 미술 사조의 틀로 분류할 수 없는 예술가다. 그의 작품은 때로는 우아하게 양식화된 삽화, 상징주의, 사실주의, 후기 인상파, 아방가르드 혹은 아카데믹한 스타일을 경계 없이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10점의 판화 시리즈 '친밀한 관계(Les Intimités)에서, 발로통은 연극 무대 같은 사적인 실내에 있는 남녀의 모습을 관찰한다. 위 작품은 '친밀한 관계‘ 시리즈 중 하나인 판화 '거짓말'의 유화 버전이다. 발로통은 프랑스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 파리 부르주아 사회의 부와 고상함, 호화로운 겉모습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사적인 실내 공간을 사용한다. 그는 실내에서 펼쳐지는 커플의 거짓과 위선, 비윤리성의 멜로드라마를 보여준다. 발로통은 부르주아의 전시적인 삶의 뒤에 숨겨진 복잡하고 분열된 두 얼굴을 본 것이다.
그의 그림들은 뭔가 수수께끼 같은 세계, 미스터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수많은 단어와 문장으로 세세히 설명하는 문학작품과 달리, 그림은 단지 한 장면을 통해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따라서 관람자는 그림 속에서 많은 것을 상상하고 유추할 수 있다. 그는 '나는 겉으로는 건전해 보이지만 내면에 말하지 못한 악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즐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거짓말'과 같은 작품에서도 두 남녀 사이에 속고 속이는 미묘한 긴장과 심리적 불안, 그리고 독특한 유머를 담고 있다.
발로통은 희곡과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그림 속에서도 비밀스러운 극적 서사로 발휘된다. 발로통은 전통 사회에서 현대 도시 사회로 변화해가는 시대적 격동기의 특성을 예리하게 감지했다. 이런 측면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온통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언어로 하는 거짓, 즉 거짓말은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거짓말이 전혀 없는 사회는 인간 본성상 불가능하다.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 문제는 건강한 사회를 망가트리는 불법과 사기에 관련된 거짓말이다.
영화 <라이어 라이어>는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지를 코믹하게 보여주고 있다. 짐 캐리의 아들 맥스는 “아빠가 하루 동안 거짓말을 못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이 소원이 이루어져, 짐 캐리는 그의 일상이었던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범죄의 증거가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는데도 뻔뻔한 표정, 새빨간 거짓말, 모르쇠로 잡아떼며 버티는 사람들의 입에서 진실이 술술 새어 나온다면? 상상만 해도 앓던 이 빠진 듯 시원하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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