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정담] 돈의 잠금장치, 에스크로

박만원 기자(wonny@mk.co.kr) 2024. 7. 3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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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몬·위메프 '환불 대란'으로 지난 30일 국회에 불려나온 구영배 큐텐 대표는 정산이 안된 1조원의 행방에 대해 "회사에 자본이 남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산 지연 사태 3주가 지나서야 얼굴을 드러낸 CEO가 남 얘기하듯 답하자 피해자들은 가슴을 쳤다.

남의 돈으로 무리하게 재투자하고 사고가 터지면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모습이 '건축왕' '빌라왕'들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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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몬·위메프 '환불 대란'으로 지난 30일 국회에 불려나온 구영배 큐텐 대표는 정산이 안된 1조원의 행방에 대해 "회사에 자본이 남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산 지연 사태 3주가 지나서야 얼굴을 드러낸 CEO가 남 얘기하듯 답하자 피해자들은 가슴을 쳤다. 그는 또 미국 기업을 인수하는 데 판매대금을 끌어다 썼다고 털어놨다. 남의 돈으로 무리하게 재투자하고 사고가 터지면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모습이 '건축왕' '빌라왕'들을 떠올리게 한다. 국내 4·5위 대형 이커머스 업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고객 돈을 받아 납품 업체에 정산하기까지 몇 달씩 쌈짓돈처럼 운용할 수 있고, 판매대금을 예치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모든 거래에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잠금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에스크로(escrow) 제도다. 에스크로는 구매자와 판매자 간 신용관계가 없을 때 제3자가 결제대금을 보관하다가 거래 조건이 충족된 뒤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미국에서 1930년대 대공황 시기 파산이 일상화돼 돈 떼인 사람들이 급증하자 거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처음 도입됐다. 2차대전 이후 부동산 붐과 맞물려 주택 거래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2000년대 들어선 온라인 거래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국내에선 전세사기가 급증한 뒤 에스크로 도입 요구가 제기됐다. 전세보증금 일부를 제3자에 예치하게 하면 안전하게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증금을 운용할 수 없어 전세 거래를 위축시킬 거란 반론도 있다. 그럼에도 신뢰의 위기를 이대로 방치해선 안된다. 공인중개사를 낀 거래조차 돈을 떼이고, 대형 이커머스 주문도 환불이 안된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인정한 전세사기 피해자는 현재 1만2000여 명에 달하고, 올 상반기에도 임차인들이 떼인 전세금이 무려 2조7000억원이다. 이커머스도 마찬가지다. 출혈경쟁과 적자 구조로 인해 언제든 제2의 티몬이 나올 수 있다. 신뢰의 위기가 확산돼 시스템이 붕괴되기 전에 잠금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박만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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