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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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고 하였던 단어 중 하나가 '중립'이다.
그보다는 권력이나 금력 같은 우월한 힘을 쥐고 있는 쪽일수록 '중립'이 불편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적으로 약간이라도 마음이 가는 쪽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임명장을 받는 순간부터 국민들에게 '저는 (편향을 실행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자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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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고 하였던 단어 중 하나가 '중립'이다. 처음에는 주로 듣는 쪽이었을 터인데 생소했다. 1990년대만 해도 중립이라고 하면 '중립국' 스위스가 먼저 생각날 정도로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기 때문이다.
초임으로 발령받고 일반 형사사건, 특히 고소사건을 담당하는 형사부 업무를 수행하면서 직책상 왜 '중립'적이어야 하는지 곧 알게 됐다.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약간이라도 보이는 것, 그렇게 느껴지게 하는 것, 오해 살 우려가 있는 외양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만으로도 항의와 불신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판사나 검사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간편한 길은 '중립을 지키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고소인의 주장대로 판단하거나, 피해자의 주장대로 결정하거나, 피의자의 변명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이보다 더 쉬운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세상일이 간단하게 엮여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건들이 부지기수다. 법정에 올 때까지의 사연을 어찌 다 재현하고 구증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을 수없이 겪다 보니 '중립'은 판사와 검사의 직무상 숙명과 같은 것으로, 결과적으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걸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가장 많이 하게 된 말이 되었다.
그런데 누가 어떠한 기준으로, 중립이 아닌데 중립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각자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상대방이 자신보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를 판단할 수는 있지만 어떠한 일에 중립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드라마를 보듯이 전말을 훤히 꿰고 있다면야 전지전능하게 수학적으로 정확한 '중립' 좌표를 찍을 수 있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할 말 많은 다양한 사연이 섞여 있으니 그렇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드물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그래도 '중립'이어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중립'일까 항상 고민하게 되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얻은 결론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중립은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명한 과정', 즉 양측에 똑같은 기회를 주고 똑같이 안내하며 이쪽에 한 설명을 저쪽에 알리면서 투명하게 하는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분도 적지 않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권유할 수 있는 더 나은 실천 방안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과정'을 지키도록 유도하거나 강제하는 법규와 같은 가이드라인이 형성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중시하거나 '과정'이 필요한 시기를 뼈아프게 겪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는 권력이나 금력 같은 우월한 힘을 쥐고 있는 쪽일수록 '중립'이 불편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공무담임에서 벗어날 즈음에는 우리나라에는 평생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임명직 자리가 몇 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적으로 약간이라도 마음이 가는 쪽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임명장을 받는 순간부터 국민들에게 '저는 (편향을 실행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자리 말이다.
[문무일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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