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폰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 크고 시끄러운 널 사랑할래
“들려요, 들려요, 쟤(이영지) 목소리 들려요.” 2022년 여름에 방송된 예능 프로그램 <뿅뿅 지구오락실>(tvN). 4명의 출연진이 헤드폰으로 귀를 막고 입 모양만 보고 문제를 맞히는 ‘고요 속의 외침’이라는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래퍼 이영지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음악이 흐르는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뚫고 게임 파트너인 미미(아이돌 ‘오마이걸’ 멤버)의 귓속으로 꽂혔다. “우리 엄마 인천에 있는데 거기까지 들리겠다.”(개그맨 이은지) “헤드폰을 뚫고 들리는 건 초유의 사태인데….”(나영석 프로듀서)
지칠 줄 모르는 남다른 에너지
‘괄괄이’ 이영지의 활극이었다. 2022년 처음 방송을 탄 <뿅뿅 지구오락실>은. 당시 유튜브에서는 힙했지만 힙합 신이나 코미디 장르를 넘어서까지 대중적이지는 않았던,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던 이영지, 이은지 등의 멤버를 기용한 이 프로그램은 대성공했고, 시즌2 제작·방송에 이어 멤버들이 같이 국내 여행을 가는 스핀오프 프로그램 <지락이의 뛰뛰빵빵>까지 나왔다. 성공의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영지의 ‘지칠 줄 모르는 남다른 에너지’의 지분이 컸다. 이영지의 큰 목소리와 괄괄한 발언, (진행자가 아닌데도) 거침없이 진행하는 모습에 보는 사람들은 고막에서 피가 날까 고막 관리를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예능인인지 래퍼인지 “본업이 의심된다”는 댓글이 종종 발견될 무렵인 2024년 6월21일, ‘괄괄이’ 이영지가 〈스몰 걸〉(Small Girl)이라는 타이틀곡을 담은 음반 《16 판타지(Fantasy)》를 발표했다. 2019년 고등학생들의 랩 경연 프로그램 <고등래퍼3>(Mnet)에서 1위를 하며 대중에 이름과 얼굴을 알린 뒤 5년 만에 나온 첫 앨범이다.
〈스몰 걸〉은 발매 이후, 음악 방송 출연 없이도 음악 방송 1위를 차지하고, 멜론 차트 등 국내 주요 음원 차트 1위에 올랐다. 발매 한 달이 지난 7월에도 뉴진스, 에스파 등 아이돌 그룹 음악이 상위권에 포진해 있는 해당 차트들에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7월 첫 주에는 앨범 《16 판타지》가 ‘빌보드 글로벌 200’(미국을 포함한 세계 200여 지역에서 수집된 스트리밍과 음원 판매량을 토대로 매긴 순위)에 38위로 입성해 2주 동안 차트 안에 있었다.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 2140만 회(2024년 7월24일 기준) 넘게 재생됐다.
〈스몰 걸〉이 값진 것은 직접 가사를 쓴 이영지가 곡에 담은 ‘자기 고백’ 때문이다. 〈스몰 걸〉에서 이영지는 달콤하게 부른다. “나에겐 ‘작은 소녀’에 대한 판타지가 있어. 그래도 날 사랑해줄래? 내가 큰 웃음, 큰 목소리, 크고 시끄러운 성격을 가졌더라도, 나를 인정해줄래?”
이영지는 175㎝의 키 큰 여자다. 키만 큰 게 아니라 ‘괄괄이’라는 별명처럼 큰 목소리로 거침없고 지배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여자이기도 하다. 이를 당당하게 내보이면서 음악 활동과 예능 활동을 해왔다. 그런 그가 〈스몰 걸〉이라는 곡을 통해 자신에게도 ‘작음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고 일종의 ‘빅 걸 콤플렉스’를 고백한 것이다.
몸집이 큰 여성들은 대체로 큰 몸집을 웅크리는 데 많은 신경을 쓴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저술가 록산 게이는 책 <헝거>에서 뚱뚱한 사람으로서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밀쳐지며 존중이나 배려를 받지 못하는 상황, 비행기 여행을 할 때 자리에 되도록 몸을 웅크리고 최대한 남들 눈에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다가 아예 좌석을 두 자리씩 예약하는 상황, 제대로 앉을 수 없는 1인용 의자만 갖춰진 식당 의자에 엉덩이를 구겨 넣은 채 불편하게 식사 시간을 보냈던 상황 등을 털어놓는다. 몸이 큰 그가 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수치심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스몰 걸 콤플렉스, 빅 걸 콤플렉스
88명의 여성과 몸에 관해 묻고 답한 인터뷰집 <말하는 몸>의 저자 유지영 <오마이뉴스> 기자는 대체로 과체중이거나 비만이었던 터라 “엄마와 함께 옷을 사러 가는 날이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돼 있다”고, “엄마와 함께 옷가게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송구해진 딸들의 자조 모임 같은 게 존재할지 모른다”고 썼다.
몸집이 작은 여성들도 다르지 않다. <말하는 몸>에서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 편집장 강혜민은 키는 153㎝, 몸무게는 45㎏으로 작고 말랐지만, “늘 약간 통통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오빠가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많이 놀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빠가 제 팔목을 딱 잡은 거예요. 그러더니 굵다고 놀리는 거죠. 자기 팔목보다 굵다고요. 정말 오빠 팔목보다 내 팔목이 굵네. 충격을 받고 역시 난 뚱뚱하고 못생겼어, 라는 생각을 체화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고백했다. 대학을 간 뒤 사회생활을 하면서 듣게 된 ‘귀엽다’는 말로 인해, “귀여운 존재로 있을 때의 따듯한 관계 맺음이 제게 너무 강렬해서 이걸 놓기가 쉽지 않다”고.
정상적인 몸의 크기, 두드러지지 않는 목소리를 가진 작고 귀여운 존재일 때 세상에 덜 위협적으로 인식되는 여성들은 그 규격에서 벗어났을 때 경험하는 말과 행동과 시선 때문에 ‘규격’에 대한 강박을 갖는다. 〈스몰 걸〉은 그 ‘강박’으로 인한 상처들에 밴드를 붙여준다.
〈스몰 걸〉 뮤직비디오에는 세상보다 훌쩍 커져버린 거인 소녀가 걷는 걸음에 전신주가 무너지고 도로가 부서지는데, 자전거를 타고 소녀를 향해 날아오르는 작은 소년이 등장한다. 거인 소녀의 손에 난 작은 상처에 힘껏 밴드를 붙여주는 소년의 몸짓에 사람들은 위로받았다. 각자가 받은 위로들은 라디오 프로그램 사연처럼 3만여 개의 댓글로 남아 있다.
“170 이상 소녀는 울다 갑니다. 어렸을 때부터 ‘큰 키에 덩치는 산만 해서 왜 이렇게 눈물은 많냐’라는 말에 숨어서 울어야 했던 날들을 모두 위로받은 기분이에요.”
“영지 소녀, 당신은 지난 세월 수없이 ‘스몰 걸’을 선망한 ‘빅 걸’들의 마음에 밴드를 붙여줬어. (…) 키 크는 게 싫어서 머리 위에 베개를 쌓고 자고, 예쁜 구두를 못 신게 될까봐 일부러 한 사이즈 작은 실내화로 발을 조이던 어린 나에게 너무나 필요했을 노래야. 영지 소녀 덕에 지금 자라는 빅 걸들은 조금 더 빨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겠지.”
“저는 152㎝, 작은 키의 20대 여성인데 뮤비랑 댓글 보고 눈물이 하염없이 주륵주륵 나와요. 콤플렉스라는 건 사회가 제시하고 주장하는 이상적인 기준에 자신을 견주다보니까 생기는 거고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나 모자람이 전혀 아닌데….”
“나 이거 보고 울었어. 난 키가 큰 건 아니지만 입도 크고 크게 웃고 자기주장과 신념도 강한 사람인데, 이게 매번 내 단점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거든. (…) 내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나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에너지를 주는 곡이야.”
욕심 많은 ‘난년들’이 성공한다
2022년 <뿅뿅 지구오락실>이 처음 시작될 때, 누가 참여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제작진은 이영지에 대해 “괄괄한 친구 한 명 올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영지는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간 예능 프로그램에서 ‘괄괄이’라는 별명과 캐릭터를 다진다. 괄괄이 이영지 아래에는 ‘급발진’ ‘미국 갱스터’ ‘목청에 깃든 영혼’ ‘생애 최대 데시벨’ 같은 자막들이 자주 등장했다.
달라진 점은 이전에 시끄럽고 괄괄한 캐릭터를 담당한 여성 예능인들에게 비호감의 정서가 주로 연결됐다면, 2020년대 ‘괄괄한 이영지’는 ‘문화 대통령’ 같은 아이코닉한 수식어를 얻고 당당함, 솔직함 같은 긍정적 정서와 더 많이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영지는 성공과 성장의 욕망도 부정하지 않고 드러낸다. 지금은 쉬고 있는 자신의 유튜브 프로그램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에 게스트로 여성 아이돌이 나오면 그들이 어떻게 커리어를 설계하는지,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등을 묻고 나눴다. 아이브의 안유진과 뭘 위해서 일하는지, 동기는 무엇이고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하다가 “욕심이 많은 것 같다”는 안유진의 말에 이영지가 정리한다. “너도 나도 욕심이 많아. 근데 욕심이 많은 지지배들이 성공한다.” 그리고 한마디 더. “아, 이거 난년들 대화인데.”
‘난년’ 이영지에게도 악플이 있고 시련이 있었다. <고등래퍼3>에서 우승하고, <지구오락실>로 대중적 인지도가 한껏 높아진 뒤 또다시 힙합 경연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11>(Mnet)에 출전했을 때였다. 거의 매회 공정성 시비 등 잡음이 생겼고, 경연에서 올라가도 음악에 대한 인정이 아닌 ‘인기투표’라는 냉소가 따라붙었다.
이영지는 여기서도 정면으로 할 말을 했다. 준결승 무대에서 부른 노래는 〈위치〉(Witch, 마녀)였다. “나는 ‘위치’야. 너는 네 위치가 어디딘지 아는 게 좋을 거야. 나는 21살이고 나는 포악해. 대부분의 사람이 그들의 기준으로 내 가치를 말해. 자극적인 TV 속 더 자극적인 생태계, (…) 작은 소녀의 발전이 너의 앞길을 막아선다는 피해의식. (…) 나는 ‘위치’야. 너는 네 위치가 어딘지 아는 게 좋을 거야.”
이영지가 붙여주는 힐링 밴드
마녀는 원래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여성학자 바버라 워커는 많은 문화권에서 마녀가 약초를 줍고, 치료 상자를 지닌 ‘치료사’로서의 은유적 이름을 가졌다고 지적했다(<여성괴물>, 바버라 크리드 지음, 여이연 펴냄). 2024년 ‘스몰 걸’로 돌아온 ‘빅 걸’ 이영지는 힙합이라는 음악을 통해 솔직함과 당당함으로 사람들에게 치유의 밴드를 붙여주고 있다. 시끄럽고 큰 웃음소리를 가진 이영지를 사랑할 이유가 늘었다.
박수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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