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 ⑥...이상 돌아오다

성도현2 2024. 7. 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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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이에 연합뉴스 K컬처 팀은 독자 제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 등 설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서울미래유산 이상의집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1937)이라는 '이상한' 사람을 처음 만나게 해 주신 분은 나의 은사 이어령(1934~2022) 선생님이셨다. 중학생 때이니 70여년이 넘었다.

'오감도'의 한자가 틀렸느냐는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그때 나이에 이상이 지은 난해한 시와 선정 소설은 우리를 매료시키는 각성제였다. 정말 '이상한 가역반응'을 일으키는 만남이었다.

그렇게 이상에 빠져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니 바로 그 이상이 우리 학교의 선배라고 했다.

경성공업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가 서울공대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이상(理想)이었던 그 이상이 바로 수십여년 전에 같은 교사에서 같은 건축 공부를 했다니 기뻤다.

교수님 중에는 이상과 같이 학교에 다닌 분들도 계셔서 시인 이상 이전에 건축과 친구 이상의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 (서울=연합뉴스) 조보희 기자 =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 천재 시인 이상이 20년 넘게 살았던 집터의 일부에 만들어진 문화공간이다. 2019.6.5

그래서 또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이상에 빠져 음주 시대를 보냈다.

이상과 금홍이의 집을 설계도로 그려 보기도 했다. 여자는 밤에 돈을 벌고, 남자는 낮에 잠을 자는, 시간이 도치된 집, 주인은 안방에 거처하고 아내는 바깥방에서 일하는, 공간이 도치된 집, 그것을 건축 평면으로 그려놓고 토론을 하고 술을 마셨다.

그 엄혹하던 군사혁명 시절에 이상의 그 '데카당'(decadent, '윤리적 타락'이라는 본래의 뜻에서 19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문학 사조의 하나를 일컫는 말) 자체가 우리에겐 이상이었다.

어언 60년이 지나도록 이상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러던 지난 2002년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통인동에 이상이 살던 집이 있고 주인이 팔려고 내놓았다는 신문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 시기 얼마 전에도 우리 동네에서 윤동주 시인이 하숙하던 집이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선 사건이 있었다. 그때의 상실감 때문에 당장 이상의 그 집을 찾아갔다.

서예가인 집 주인 할머니가 이상에 대해 잘 알고 있으나 노령이라 더 이상 그 집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장 돈 3억 원이 필요했다. 나는 한 달만 말미를 주시라고 말씀을 드리고 허락받았다.

그날부터 나의 오랜 이상이었던 이상의 기억 살리기가 시작됐다. 시인협회, 문인협회 모두 뜻은 좋으나 돈은 없다고 했다.

이상의 집 내부에 마련된 아카이브 자료 [문화재청 제공]

곡절 끝에 마지막으로 찾아뵌 이어령 선생님은 흔쾌히 시장을 만나서 이 땅을 살 수 있는 돈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근대 문화유산들을 조사하는 용역비와 그것들을 관리할 500억 원 규모의 문화재단 설립에도 동의받아오셨다.

그렇게 모든 일이 잘됐는데도 현금 3억 원이 손에 들어오기에는 너무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당시 내가 사무국장으로 있던 김수근문화재단의 이사회를 소집하고 후배 이사들을 설득했다. 이상은 시인 이전에 우리에게 건축의 선배이므로 이 일은 우리 재단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일부 기금을 전용했는데 그 약속한 1년이 지나도록 문제가 해결되지를 않아 내가 그 돈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돈 때문에 어려운 게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같이 보일까 봐 피하고 싶은 결과였다.

그 사이에 이 집은 지정문화재가 됐고, 또 다행히 문화유산국민신탁 기금에서 매입하게 되면서 나 혼자서 3억 원을 부담해야 할 일은 없어졌다.

다음으로 할 일은 이 집을 '이상의 집'으로 되살리는 일이다.

그래서 오래 생각했던 '제비다방'이 개업을 했다. 아름지기에서 운영을 맡기로 했고 연극인 손숙 씨가 초대 '마담'으로 '이상 돌아오다'라는 굿판을 벌였다.

이곳에서 이상한 일들을 해 볼 생각이었다. 무미건조한 이런 시대에 이상의 차를 마시고 그의 이상을 이야기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몇 사람이라도 모여서 '이상식'의 그 이상한 방법으로 우리의 이상한 시대를 바꾸어 놓을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이상이 오렌지 냄새를 맡고 싶다며 생을 마감한 것처럼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도 이어령 선생님은 이상의 '날자꾸나'가 어항 속 금붕어의 지느러미 짓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주셨다.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 (서울=연합뉴스) 조보희 기자 =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 천재 시인 이상이 20년 넘게 살았던 집터의 일부에 만들어진 문화공간이다. 2019.6.5

나는 날개가 없는 사람 몸으로 날겠다고 뛰어내린 이상의 실패를 돌이켜본다. 진공이나 무중력 상태가 아니면 사람은 날자고 들면 틀림없이 추락하는 것이다.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성도현 기자>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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