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 재정보다 지속가능 재정…국가채무비율부터 바꿔라 [전문가리포트]
재정건전성은 많은 경우 국가 재정의 건강한 상태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어 온 개념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이미 재정은 ‘건전’해야 한다거나 ‘건전하게’ 운용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 가치’가 투영돼 있다. 이 개념에 도전하거나 반문할 경우 ‘재정은 건전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인가’라는 의구심에 가득찬 반론을 받게 된다.
필자는 국가 재정이 건전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건전함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부의 경제정책 목표는 경제안정, 효율적 자원배분, 소득분배의 형평성, 경제성장 등이다. 재정건전성, 그 자체는 정책의 목표라기보다는 좀 더 큰 목표로 가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정권의 보수·진보 성향을 막론하고 재정 당국은 언제나 지나치리만큼 재정건전성에 집착한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그 집착이 ‘추앙’ 수준으로 승화되고 있다. 건전재정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재정을 운용할 경우 민생경제의 회복과 안정화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우리는 본말전도에 따른 부작용을 똑똑히 체감하고 있다.
나는 여러 차례에 나눠 재정건전성에 대한 기존 담론에 대한 대안적 시각을 소개하려 한다. 대안은 어디까지나 정답은 아니지만 현재의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좀 더 지속가능한 재정 운용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가 될 것으로 믿는다.
국가채무비율은 온전히 우리 재정의 지속성을 보여주나
이번 글에선 재정건전성을 가늠하는 지표로 널리 쓰이는 지표인 국가채무비율(국가채무를 국내총생산으로 나눈 백분율)과 재정수지비율(재정수지를 국내총생산으로 나눈 백분율)의 문제점부터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는 통상 두 지표가 상승할 경우 재정 건전성이 악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사실 이들 지표는 단순하게 재정정책의 결과변수인 누적적 국가채무수준과 재정수지 적자를 국내총생산으로 나눈 숫자에 불과하다. 경기변동에 대한 대처, 경제위기 극복 과정의 막대한 재정지원, 또한 경제사회의 구조전환 지원 등 숫자로 나타나지 않은 정책과 그 성과들은 이 지표에 담기지 않는다. 매우 협소한 의미만 담기는 재정 지표란 뜻이다.
특정 수치의 국가채무비율 등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치 않겠다는 재정당국은 그리스 신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에 나오는 도끼를 든 거인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지낸 거시경제학의 석학인 올리비에 블랑샤 교수의 일갈에 나는 공감한다. “무엇이 안전한 국가채무 수준인가를 논의할 때 마술 같은 숫자는 없다. 또한 국가채무비율과 재정수지적자 비율의 황금조합 역시 없다.”(2022, Finance and Development)
좀 더 들어가 보자. 국가채무비율을 계산할 때 분자인 국가채무 규모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발행된 국가채무의 누적 총합이다. 한마디로 저량(stock)지표다. 반면 분모인 국내총생산은 유량(flow) 지표다. 한마디로 국가채무비율은 1년 동안 발생한 국민경제의 소득창출 역량을 통해 과거부터 지금까지 정부의 재정정책 수행의 결과 발생한 국가채무 수준을 보여준다. 이런 비교가 적절한가.
재정건전성이 아니라 재정 지속가능성
대안은 무엇인가? 성장, 복지, 경제안정 등 전반적인 정책목표를 고려한 ‘재정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재정의 지속가능성은 중장기적인 재정운용의 기본 관점이 돼야 한다.
지속가능한 재정이란 지출 소요가 반영된 재정지출 규모를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지를 일컫는다. 정부는 한 해 벌어 한해 사는 재정운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해연도 재정수입을 벗어난 재정지출을 할 수 있다. 당연히 이 차액은 빚을 내어 메운다.
이렇게 늘어나는 국가채무가 상환 가능한 범위에 있다면 그 채무는 ‘지속가능한 채무’이고 이때 재정은 지속가능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세입을 통해 국가채무에 대한 이자를 갚을 수 있어 이자를 또 다른 빚으로 메우지 않고 채무비율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재정은 지속가능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채무 규모 자체보다는 세입이 장기적으로 재정지출 소요를 감당할 정도로 충분한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확인을 위해선 지표가 필요하다. 이 새로운 지표에 ‘재정 지속가능성 지표’라고 이름을 붙여보자.
재정이 지속가능한지 여부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미래에도 국가가 정상적으로 재정수입을 통해 이자 지급을 포함한 채무부담을 질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래에도 발생할 국민경제의 소득창출 능력을 현재가치로 평가하여 측정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분모를 당해연도 국내총생산이 아니라 현재부터 미래의 특정 시점(보통 국채 평균만기)까지의 국내총생산의 현재가치를 합산한 저량으로 계산하여 저량-저량 비율로 평가하는 게 좀 더 바람직하다. 또 다른 대안도 있다. 1년 동안의 국가채무 이자 지급 규모를 분자로 하고 분모는 1년 동안의 국내총생산으로 삼아 계산한 유량-유량 비율로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필자 개인 의견이 아니다. 거시경제학의 석학인 제이슨 퍼먼 미 국가경제회의 수석부의장(하버드대 교수)와 로렌스 서머스 미 전 재무장관(하버드대 교수)가 일찌감치 시작했으며 이 기준에 따른 재정 지속가능성을 평가한 연구들도 적잖다.
대안 지표로 평가할 때 한국의 재정은 더욱더 건전하고 튼튼한 것으로 나타난다. 필자가 퍼먼 교수 등이 제안한 방법론을 활용해 한국의 지속가능성을 따져보니 저량-저량 평가에선 한국은 5% 미만이며. 유량-유량 평가에선 1%를 살짝 웃도는 수준에 그친다.
재정보수주의는 재정관료의 DNA
우리나라 재정당국은 유독 대안 지표 논의에 관심이 적다. 재정 보수주의를 보여주는 한 징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럴까. 나는 재정 관료들이 스스로를 나라 살림의 금고지기로 생각하며 지나친 사명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재정건전성이 마치 신화와 같이 된 이면에는 재정 관료들의 금고지기에 대한 지나친 사명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우리나라의 재정 관료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재정 관료들의 지출통제에 대한 보수적인 관념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이를 유추하기 위해 근대적인 국가재정의 기틀이 마련될 무렵인 18세기 후반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인이자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의 경제개혁 법안을 눈여겨보자. 그는 1780년 2월 11일 영국 하원에서 경제 개혁법안(the Civil List and Secret Service Money Act 1782)을 제출했다. 여기에는 왕실 운영을 위한 보조금지출(the Civil List)과 관련한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 법은 Civil List 지출 목록을 8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이 등급에 따라 지출의 우선순위가 정해 이 분류를 벗어난 지출을 할 수 없도록 한 게 특징이었다. 이 중 ‘왕실에 대한 연금 및 수당’이 1등급이고 ‘재무부 장관(the Commissioners of the Treasury and Chancellor of the Exchequer)의 급여 및 연금'은 가장 낮은 8등급으로 분류됐다.
버크의 애초 아이디어는 만약 정부지출이 Civil List에서 규정한 금액보다 더 많이 지출하게 될 경우 부채로 부족한 자금을 조달하는 대신 최하위 등급부터 상향해서 취소하게 하는 것이었다. 최하위 등급인 8등급에 지출 관리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급여가 포함된 것은 이 아이디어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됐다는 걸 의미한다. 즉, 버크는 재무부 관리들이 자신의 급여를 잃기보다는 지출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할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것이 재정보수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류덕현 중앙대 교수
▶ 필자소개
현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이자 ( 사 ) 경제추격연구소 소장이다 . 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사회과학회장을 지냈다 . 미국 라이스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 한국조세재정연구원 (KIPF) 의 전문연구위원 및 세수추계팀장을 역임했다 . 2012 년 한국재정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재정정책 , 거시경제 , 응용 시계열 계량경제학 연구 등을 주로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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