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위의 시대, 세계의 격동과 한국 [신진욱의 시선]
한국 보수의 퇴행적, 약탈적 성격은 대중 속에 무섭게 파고든 서구의 우익포퓰리즘과 다른 것이다. 이는 그들의 도덕적 권위와 권력 기반이 빈약하다는 뜻도 되지만, 거기 내포된 위험은 그들과 경쟁하는 상대 진영 역시 마치 거울상처럼 같은 수준으로 동반 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한두달 사이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주목할 만한 여러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다. 유럽에서는 유럽의회 선거와 프랑스, 영국 총선이 실시되어 권력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후,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에서 물러나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지명하면서 대선 경쟁이 더욱 뜨거워졌다.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중도 좌우파와 녹색당 그룹이 약화된 반면, 극우정당들이 성공을 거두어 ‘유럽을 위한 애국자들’이라는 이름의 강력한 원내 그룹을 구성했다. 2000년대부터 꾸준히 성장한 극우 그룹은 이제 유럽의회에서 세번째로 큰 세력이 되었다. 이에 따라 유럽의 기후, 외교, 가족·젠더, 복지, 이주·난민 정책에 적잖은 변화와 갈등이 예상된다.
이 선거에서 프랑스는 극우정당들의 득표율 합계가 무려 43%나 되고, 이탈리아도 38%에 달하여 두 나라 모두 극우가 1위를 했다. 독일은 중도보수인 기독민주연합이 30%를 얻어 1위였지만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이 16%로 2위를 차지했고, 집권 사민당은 3위에 머물렀다. 이렇게 유럽에서는 ‘극우의 주류화’가 진행 중이다.
그 여파로 프랑스 총선도 조기 실시되었는데, 극우 ‘국민연합’이 1차 투표에서 충격적인 33%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가 결선투표에서 중도연합과 좌파연합이 협력하여 가까스로 극우의 집권을 막았다. 2022년 대선에서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결선투표까지 가서 극우정당 마린 르펜 후보를 겨우 꺾었다. ‘이탈리아의 형제들’, ‘헝가리 시민동맹’ 같은 극우 정당들이 이미 집권하고 있는 나라들에 이어서, 프랑스에서도 극우정당이 집권 문턱까지 와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극우’는 단순히 보수나 중도우파보다 ‘더 과격하다’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다. 극단주의의 본질은 현대의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훼손한다는 데 있으며, 특히 극우는 평등주의에 반대해서 인종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 여성 혐오, 빈민 혐오, 이슬람 혐오, 동성애자 혐오 등 다양한 형태로 지배와 불평등, 차별을 옹호한다는 게 특징이다. 극우가 집권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존엄과 권리가 합법적으로 박탈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21세기 극우의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의 유연성과 모호성이다. 과거에 그들은 거친 언어와 문화, 불법폭력 행위로 인해 사회에서 고립되었고 득표율도 1~2%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선거를 활용해 권력을 키우고, 대중의 불안과 욕망에 접속한다. 경제 불안, 이민과 난민, 치안, 테러, 복지, 이스라엘에 대한 입장 등 모든 현안이 기존 정치세력과 그들이 표방하는 가치를 희화화하고 극우를 확장하는 자원이 된다.
이런 현상은 역사적 위기의 징후다. 위기란 옛 질서가 해체되었으나 새 질서는 나타나지 않은 불확실성의 상태다. 20세기 사회체제는 세계화, 정보화, 개인화, 탈산업화, 탈냉전기 국제분쟁과 같은 여러 변화로 인해 더 이상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지만, 그것을 대체할 체제는 보이지 않는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세계상황을 ‘공위(空位)의 시대’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단지 혼돈의 암흑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는 정치의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 유럽에서 일어나는 격동의 본질은 미래에 대한 상반된 비전의 충돌, 심대한 가치의 충돌이다. 극우 세력은 2차대전 이후 좌우를 막론하고 합의해온 민주주의, 다양성, 평등, 인권 같은 기본 가치들을 파괴하고 있고, 그에 맞서 보수, 사민, 중도, 녹색, 좌파 세력이 경쟁하고 협력하는 정치연합이 형성되고 있다.
미국에서도 그와 유사한 대결이 진행 중이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은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트럼프 집권기 동안 미국은 여러 민주주의 평가기관에서 ‘온전한 민주주의’로 평가받지 못했다. 2020년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트럼프의 선동하에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점거하고 사상자가 발생한 날은 우리가 알던 미국 민주주의의 사망일이었다.
나아가 지금 미국 사회는 지난 수십년간 진행된 사회 변화에 대해 근본적으로 상반된 태도로 갈라져 있다. 트럼프의 지지층은 백인, 기독교, 가부장제, 가족주의의 지배를 지키기 위해 ‘좌파’, ‘이민자’, ‘페미니스트’, ‘동성애자’를 맹렬히 공격하고, 그 반대편에는 다양성과 개방, 평등, 다인종사회를 옹호하는 세력이 맞서고 있다. 오는 대선은 ‘어떤 미국을 만들 것인가’를 놓고 두 비전이 격돌하는 운명의 시간이다.
이처럼 세계가 미래의 비전을 놓고 격동하고 있는 것과 대조되게, 한국 사회는 깊은 정체의 늪에 빠져 있는 듯하다. 한국 보수는 동시대 현실을 말하는 대신, 박정희 동상 건립, 광주항쟁 폭도론, ‘100m 태극기탑’처럼 냉전반공 시대를 추억하는 일에 몰두한다. 윤석열 정부는 국민이 부여한 권력으로 고소득자 세금 감면, 대기업을 위한 조세지출 확대, 초고자산층 상속세율 인하, 종합부동산세 폐지 추진 등 상층계급의 사익 보장에 여념이 없다.
한국 보수의 그러한 퇴행적, 약탈적 성격은 대중 속에 무섭게 파고든 서구의 우익포퓰리즘과 다른 것이다. 이는 그들의 도덕적 권위와 권력 기반이 빈약하다는 뜻도 되지만, 거기 내포된 위험은 그들과 경쟁하는 상대 진영 역시 마치 거울상처럼 같은 수준으로 동반 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급한 보수 정치와 싸우는 자의 눈높이도 거기에 맞춰지기 쉽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는 바우만이 가장 중대한 위기 상태라고 말한 “비전의 결핍, 주체의 부재”의 깊은 골짜기에 빠져 있다. 이대로 계속 갈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미래를 설계하는 대안의 담론도, 어떤 나라를 만들지에 관한 비전의 격돌도 찾아볼 수 없다. 사회에는 오직 무기력과 피로감, 소멸과 대환멸의 서사만 가득하다.
그러한 불능감은 궁극적으로 정치의 무능에서 온다. 세상을 바꾸는 자유는, 한나 아렌트가 통찰했듯이, “‘나는 의지한다’와 ‘나는 할 수 있다’가 동시에 일어날 때” 가능하다. 변화를 갈구하나 그것을 실현할 힘이 없는 괴리, 사이토 준이치가 말한 어떤 “낙차”에서 좌절이 생긴다. 정치가 변화를 조직하는 힘이 될 때 사회는 다시 꿈틀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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