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나의 우상, ‘민기 아저씨’와의 맞담배

한겨레 2024. 7. 31.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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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 l ‘뒷것’ 김민기를 기리며
김내현 로큰롤라디오 멤버
2004년 어린이 뮤지컬 ‘우리는 친구다’를 연출할 당시 김민기 학전 대표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나의 부모님은 너무나도 좋아하던 전설의 가수를 도와 불법 테이프를 만들었다. 아버지(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그 가수의 자료들을 모아 ‘김민기’라는 책으로 엮어냈고, 엄마(‘노래를 찾는 사람들’ 출신 가수 조경옥)는 너무나도 좋아하던 그 가수가 만든 노래극의 주인공 역할을 맡아 노래했다. 보통 우상과 가까워지면 실망하기 마련이다. 가수와 팬으로,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 함께 불법을 도모하던 동지이자 선후배로, 프로듀서와 가수로, 연구 대상과 연구자로, 같은 동네 사는 친한 형·동생으로 그 관계가 변모하는 동안 4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했던 것을 보면 엄마·아버지가 우상에게 크게 실망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 덕에 나는 남들 모두가 존경을 담아 무거운 마음으로 선생님이라 부르는 거인을 비교적 만만하게 ‘민기 아저씨’라 부르며 자랐고 거인의 두 아들, 김종화·김소윤이라는 친구를 얻었다.

어릴 때 집에서 동요 테이프 같은 걸 들어본 기억이 없다. 부모님은 ‘어젯밤 꿈에 엄마가’ ‘날개만 있다면’ 같은 노래들로 일찌감치 내게 거인의 음악을 ‘가스라이팅’ 했는데, 그 과정은 주로 노래극 엘피(LP)를 틀어놓고 엄마 목소리가 나오는 파트를 찾으면서 이루어졌다. 매일 같이 듣던 그 엘피엔 김민기라는 이름이 가장 커다랗게 있었고 누군가 사인펜으로 내 이름과 함께 ‘민기 아저씨’라고 적어 놓았다. 그 ‘민기 아저씨’는 1996년 내가 11살 때 경기 고양 일산으로 이사간 이후로 매주 주말농장에 가면 만나는 아저씨였는데, 그땐 그저 김종화·김소윤과 노는 게 재미있었다. ‘백구’ ‘작은 연못’ 같은 예쁜 노래들로 나의 감수성이 채워지길 기대하셨을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머리가 커가면서 나의 취향은 과격하고 시끄러운 너바나, 메탈리카 등의 록 밴드를 향했다. 로큰롤 꿈나무에게 민기 아저씨의 노래들은 아주 유명하지만 그냥 부모님이 종종 부르는 옛날 음악이었다.

지난 2022년 12월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가수 조경옥(가운데 꽃 든 이)의 공연이 끝난 뒤 찍은 기념사진. 맨 왼쪽이 김민기 학전 대표,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내현이다. 김내현 제공

내가 거인의 진면목을 체감하기 시작한 건 군대를 전역하고 24살 때 학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였다. ‘슈퍼맨처럼’이라는 아동극을 할 때였는데, 반강제적으로 거의 두달 동안 매일 봐야만 했다. 극의 모든 대사를 외웠을 무렵, 문득 이걸 전부 다 민기 아저씨가 썼다는 사실이 떠올랐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 대사들과 노랫말이 가진 생동감은 아저씨가 12살 어린이에 빙의했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아저씨 안에 12살짜리 애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노랫말이 가지는 미적 가치에 대해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계기였다. 그날 이후 나는 민기 아저씨의 모든 작품을 하나하나 살폈고, 아저씨는 나의 우상이 되었다.

엄마는 종종 내가 하는 밴드 로큰롤라디오의 음반이 나오면 “민기 아저씨가 들어보더니 괜찮대”라는 평을 전하곤 하셨다. 엄마는 항상 “그 아저씨는 절대 빈말 안 해”라고 덧붙이며 나보다 더 뿌듯해하셨다. 그때마다 그냥 아저씨가 우리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듣고 싶은 말을 해준 것이라 여겼다. 약간 과장을 보태 말해 보자면, 내게는 그 말이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부처님은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처럼 들렸다. 너무나 큰 뜻을 지닌 문장들이지만 그 거대함 때문에 오히려 공허하고 현실감 없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저씨의 작업들은 도무지 내가 교만해질 틈을 주지 않고, 언제나 나의 작업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큰 바위 얼굴 같은 존재였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일 때, 하루는 김종화를 따라 학전으로 갔다. 오랜만에 인사나 드릴 겸 아저씨 사무실까지 올라갔다. 언제나처럼 적당히 취해 계셨지만 반갑게 맞아주시며 “음악 하는 거 힘들지?” 물으셨다. 당시 공연도 없고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라 작업하는 게 손에 안 잡힌다고, 가사는 대체 어떻게 쓰셨냐고 여쭈었다. 아저씨는 풍경화를 그리듯 쓴다고 간단하게 답하시고는 담배를 피우셨다. 그리고는 조용히 내게 담뱃갑을 내미셨다. 이걸 받아서 피우는 게 맞는 건가 잠시 고민했다. 이것은 김창남·조경옥의 아들이 아닌, 김종화·김소윤 형제의 친구가 아닌, 까마득히 어린 음악 하는 후배에게 전하는 것이라 믿고 용기 내 한 개비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이래도 되는 건가, 긴가민가했지만 민기 아저씨가 나를 음악 하는 후배로 인정하셨구나 하는 마음에 혼자 들떠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김종화 친구 중에 민기 아저씨와 술을 마셨다는 애들은 몇명 있지만 맞담배를 피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었으니까.

재작년 12월 학전에서 로큰롤라디오가 아저씨 앞에서 ‘강변에서’와 ‘차돌 이내몸’을 연주하면서, 그리고 작년 10월에 열린 김소윤의 결혼식에서 아저씨가 매우 고심하셨다는 축가 무대의 오프닝을 맡게 되면서 비로소 아저씨가 나를 음악 하는 후배로 보고 계신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음에 음반이 나오면 이제 엄마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민기 아저씨께 직접 드리리라 마음먹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밴드 로큰롤라디오 멤버 김내현. 김내현 제공

누군가를 기리는 동상은 무쇠로 만들어진다. 부서지거나 모양이 변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우상에게서 언제나 변치 않는 동상 같은 모습을 기대한다. 긴 시간 고수해 왔던 결벽증에 가까운 그 고집으로, 끝까지 까칠하지만 단단한 모습만 보여주고 간 아저씨의 삶은 앞으로도 나처럼 그를 우상으로 여겼던 수많은 이들의 마음에 단단한 동상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아마 진짜 동상을 세운다고 한다면 결사코 반대하실 테니 그편이 나을 것 같다. 끝까지 변치 않는 우상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인생에 있어 큰 복이라 생각한다. 늦었지만 민기 아저씨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금 가장 슬퍼하고 있을 김종화·김소윤 형제에게, 그리고 미영이 아줌마께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김내현/로큰롤라디오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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