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펜실베이니아의 선혈, 정치 폭력의 ‘임계점’ 넘다

김동인 기자 2024. 7. 31.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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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폭력이 민주주의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트럼프 암살 시도는 정치 폭력의 에너지가 어떤 임계점을 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파성은 자극적인 미디어 경험으로 더 공고해진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7월13일 펜실베이니아에서 유세를 벌이던 중 총상을 입었다. 그는 대피하는 와중에도 대중과 카메라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며 “파이트(Fight)”라고 소리쳤다. ⓒAP Photo

민주주의와 폭력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정치 지도자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유세 현장에서 가장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되었다. 현지 시각 7월1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선거 유세 중이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귀에 총상을 입었다. 총격범이 쏜 총알 여덟 발은 유세 현장에 참석한 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총격범은 행사장 인근에 거주하는 스무 살 토머스 매슈 크룩스로 아직 그의 범행 동기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세 현장에서 120여m 떨어진 건물 지붕에서 AR-15 소총을 이용해 트럼프 암살을 시도한 그는 현장에서 곧바로 사살되었다.

미국에서 전현직 대통령이 총격을 당한 것은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피습 사건 이후 43년 만에 처음이다. 이미 대통령 4명이 총격으로 사망한 역사가 있지만, 정보통신 발전 이후 대선후보급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이 생중계되는 현장에서 이렇게 적나라한 총격이 발생한 것은 처음이다. 사건의 충격은 반복되는 영상을 통해 더욱 증폭된다. 벌레에 물린 듯, 잠시 귀를 만지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내 주춤거리며 연단에 엎드린다. 곧바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고,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연단을 내려간다. 그러다 잠시 멈춰 대중과 카메라를 향해 주먹을 내지르며 “파이트(Fight)”라고 소리친다. 폭력의 순간은 뺨에 묻은 선혈만큼이나 선명하게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3개월 뒤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와 별개로, 전 세계가 공유한 이날의 충격은 역사의 ‘변곡점’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암살 시도가 또 다른 정치 폭력을 자극할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날 세계가 경험한 폭력은 최근 빠르게 확산되어온 정치 폭력의 에너지가 ‘어떤 임계점’을 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국지적으로 발생하던 정치 폭력과 정치 테러가 마침내는 세계 최강대국의 유력 대권주자에게로 번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 폭력은 ‘사람’을 겨냥한다

특히 올해는 선거가 치러지는 지역에서 유명 정치인에 대한 정치 폭력이 빈번했다. 최근 유럽의회 선거를 치른 유럽이 대표적이다. 5월16일,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는 슬로바키아의 중부 도시 한들로바 거리에서 총격을 당했다. 총알이 복부를 관통해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피초 총리 피습사건은 전형적인 정치 폭력의 일종이다. 벌써 세 번째 임기를 맞이하는 피초 총리는 슬로바키아의 친러시아 노선을 이끌며 유럽 내에서 요주의 인물로 꼽혀왔다. 국내로는 공영방송 폐지 등 언론 탄압 정책을 쏟아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슬로바키아 수사 당국은 현장에서 붙잡힌 총격범에게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며 이번 총격 사건이 정치 폭력임을 명확히 했다.

3주 후에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또다시 정치 지도자에 대한 테러가 발생했다. 피해자는 현직 덴마크 총리인 메테 프레데릭센이었다. 그는 6월7일 코펜하겐 광장에서 한 남성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목을 다쳤다. 부상 정도가 크진 않았고, 이번 사건을 수사한 경찰이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됐다는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라고 밝혔지만, 사건이 발생한 날짜가 하필 유럽의회 선거 기간이라는 점 때문에 온 유럽 사회가 들끓었다.

정치 지도자를 향한 극단적 폭력 발생은 동아시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022년 7월에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선거 지원 유세 중 사제 총기로 피격당해 사망했고, 이듬해인 2023년 4월에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유세 현장에서 사제 폭탄을 이용한 테러에 노출되기도 했다. 기시다 총리에 대한 테러는 다행히 인명 피해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사망한 지 1년도 안 된 시기에 유세 현장에서의 테러가 재발하면서 정치 폭력에 대한 우려가 확대됐다.

2023년 4월15일 유세 현장에서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향해 폭발물을 던진 테러범을 제압하고 있다. ⓒEPA

지금으로부터 6개월여 전인 올해 1월2일, 한국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도 피습당했다. 습격범인 김 아무개씨는 부산 강서구 가덕도에서 이 전 대표의 목 부위를 흉기로 찌른 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검찰 조사에서 김씨는 “제22대 총선에서 종북 세력이 공천을 받아 의석수를 확보하고 이 대표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적화될 것”이라고 생각해 이 대표를 습격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당시 김씨가 ‘이 대표를 살해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전형적인 정치 폭력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2022년 3월7일 송영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60대 유튜버로부터 장도리로 후두부를 가격당했다. 올해 1월25일에는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10대 남학생으로부터 돌덩이로 머리를 가격당한 사건도 발생했다.

정치 폭력은 ‘거물급’ 정치인에게만 가해지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5월4일 사민당(SPD) 소속 마티아스 에케 유럽의회 의원이 다수 괴한에게 폭행당해 안와골절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틀 뒤인 5월7일에는 베를린 한 공립 도서관에서 사민당 소속 프란치스카 기파이 베를린 경제장관이 둔기가 든 가방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기도 했다. 독일 정부는 선출직 공무원을 상대로 한 범죄가 연간 2000건 넘게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독일 사회는 정당정치와 민주주의가 안착된 국가 중 하나이지만, 이런 독일에서조차 정치 폭력은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빈번해졌다.

트럼프 피격 이후, 미국 사회에서도 일상화된 정치 폭력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 사회가 최근 수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정치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는지 되짚어보는 기사도 연이어 보도됐다. 크고 작은 폭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2022년 10월28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자택에 둔기를 소지한 괴한이 침입한 사건이다. 펠로시 의장의 남편 폴 펠로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두개골이 골절됐고, 팔과 손에 외상을 입어 수술을 받아야 했다. 미국 의전 서열 3위인 하원의장마저 정치 폭력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펠로시 피격 이외에도, 트럼프 피격 이후 미국 언론은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정치 폭력·테러를 재조명하고 있다. 지난해 5월15일에는 버지니아주 제리 코널리 하원의원 사무실에 야구 방망이를 들고 난입한 한 남성이 직원 두 명을 폭행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정치인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보좌진처럼 주변 인물까지 폭행의 대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최근 정치인을 대상으로 벌이는 정치 폭력의 한 양태다.

극단적 정치 폭력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트럼프 피격 이전부터 제기되어왔다. 2023년 8월9일, 로이터 통신은 미국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정치 폭력이 발생하고 있는지 분석한 특별 기획 보도를 발표했다. 2021년 1월6일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의회 점거 사건 이후 발생한 정치 폭력 213건을 추리고, 이들 사건을 비교 분석했다. 분석 결과 이들 사건으로 인해 총 39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로이터 통신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현재 미국 사회는 1970년대 이후로 가장 크고 지속적인 정치적 폭력의 증가와 씨름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정치 폭력은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적 견해 차이를 비롯한 각종 정치적 동기에 의한 폭력 전체가 정치 폭력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갈수록 이러한 ‘폭력의 양식’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극단주의를 연구하는 레이철 클라인펠드는 로이터 통신의 분석 기사에서 정치 폭력이 빈번한 1970년대와 2020년대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1970년대 초 정치 폭력은 좌파 급진주의자를 중심으로 발생했고, 정부 건물과 같은 재산 파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적 폭력은 ‘사람’을 겨냥하고 있고, 치명적인 정치 폭력 14건 중 13건의 가해자가 우파 성향이었다.”

좌우 극단에서 “폭력 정당하다” 17%

이 같은 환경을 더욱 강화시키고, 정치 폭력 범죄를 자극해온 인물이 바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2021년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점거 사건은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민주주의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무리가 총을 들고 의회를 습격했고, 결국 주 방위군을 동원하고 나서야 진압이 가능했다. 미국 사회에서 극단적 정파주의가 어떻게 극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2021년 1월6일 대선 결과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를 점거하고 있다.ⓒAFP PHOTO

바이든 정부 임기 동안에도 이러한 정치적 양극화는 해소되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 재도전에 나섰고, 이 와중에 발생한 7월13일 트럼프 피격은 여러 측면에서 정치 폭력의 폭발을 한층 더 유도할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피격 이후 ‘어떤 형태로든 정치 폭력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았지만, 트럼프 지지 세력은 바이든과 민주당 지지자들을 향해 거친 언사들을 내뱉고 있다. 지금 미국 사회에서 총격범의 암살 시도 동기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트럼프를 중심으로 더 강하게 결집 중인 극우 유권자들과, 그에 맞선 반(反)트럼프 진영의 극단적인 갈등이 전보다 더 증폭될 것을 다수 정치인들이 우려하고 있다.

최근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상대를 악마화한다는 점이다. 로버트 페이프 시카고 대학 교수는 올해 6월, 정치적 폭력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를 연구하기 위해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10%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무력 사용은 정당하다”라고 답했고, 응답자의 7%는 “트럼프가 재집권하기 위한 무력 사용을 지지한다”라고 답했다. 응답자의 8%는 몇 년 안에 정치적 폭력이 정당화되는 사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위해 무장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좌우 양극단에서 폭력 사용에 호의적인 이들을 합치면 17%로 결코 무시하기 어려운 비중이다. 트럼프를 중심으로 미국 사회가 얼마나 양 갈래로 쪼개져 있는지, 그로 인한 폭력이 얼마나 발현되기 쉬운 분위기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파성이 인종·계급 정체성보다 앞서는 현상도 폭력으로 쉽게 이어지게 한다. 에릭 니스벗 노스웨스턴 대학 교수(정책분석·커뮤니케이션)는 7월16일 공개된 미국 온라인 매체 〈복스(Vox)〉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정치적 폭력은 ‘당파적 폭력(Partisan violence)’이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정치적으로 특정 사안에 대해 “좌파냐, 우파냐”를 따지는 게 아니라 특정 인물에 대해 “민주냐, 공화냐”를 따진다는 것이다.

유튜브도 이런 분열을 한층 고조시킨다. 유튜브로 전파되는 트럼프 피격 장면은 CNN을 통해 마주한 9·11 테러만큼이나 초현실적 미디어 경험을 남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피격 장면 영상에 이어 다음 영상으로 사용자의 당파성에 맞는 분석을 알고리즘을 통해 추천한다.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를 쓴 미국의 정치 칼럼니스트 에즈라 클라인은 알고리즘이 정치적 양극화에 미치는 영향을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 달리기에 관심 있어서 영상을 찾다 보면, 어느새 울트라 마라톤 영상을 보게 된다.” 당파성은 가장 자극적인 미디어 경험으로 더 공고해진다. 미디어를 통한 정치 폭력의 경험이 당파성을 더 강화하고, 상대 진영을 향한 또 다른 폭력에 무디게 만들 수 있다.

당파성이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상황에서 트럼프 피격의 ‘파괴적 여파’를 최소화하는 가장 빠르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개별 정치인들이 앞서서 정치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피격 직후 트럼프와 바이든 양측의 메시지에서 일관되게 ‘어떤 형태의 정치 폭력도 반대한다’는 의사가 담겨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시적인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한쪽이 결집할수록, 다른 쪽도 결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격 직후 트럼프 지지층의 결집과 우세를 점치는 이들이 늘었지만, 당파성을 정체성의 중심에 놓는 것은 민주당 지지자, 반트럼프 성향을 갖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김동인 기자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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