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과 민속학이 만났을 때 [새로 나온 책]
걷는 망자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리드비 펴냄
“분명 관 뚜껑이 미끄러지듯 조금씩 옆으로 움직였다.”
바다에서 기어 나온 망자(亡者)가 산길을 휘청휘청 걸어 다니고, 언덕 위 대저택의 가족들은 머리 없는 여자에게 위협받으며, 강령술로 소환된 귀신이 자신을 불러낸 사람들의 목을 조른다. 한국에선 주로 여름에 ‘납량(納涼·서늘함을 준다는 의미)’이라는 명분을 빌려 주기적 명예를 회복하곤 하지만, 이야기의 세계에서 괴담은 동서고금의 보편적 인기 장르다. 민속학과 호러, 본격 미스터리의 결합이라는 독창적 작품 세계로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쓰다 신조의 단편집. 각 작품의 서두에 기괴하고 섬뜩한 유령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너무 겁이 많아서 ‘괴이’를 ‘유령이 아니라도 가능한 현실적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대학원생이 나서 필사적으로 논리적 해결책을 설명해낸다.
떠오르는 숨
알렉시스 폴린 검스 지음, 김보영 옮김, 접촉면 펴냄
“지금까지 해오지 않았던 방식으로 숨 쉬기 위해.”
사냥당하고, 부딪히고, 갇히고, 구경거리가 된다. 돌고래를 비롯한 해양 포유류의 삶을 요약하면 그렇다. 그런 해양 포유류에게서 흑인이고 퀴어이고 페미니스트이고 시인인 저자는 ‘나’와 ‘당신’을 본다. “숨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숨 쉬기란 인종, 젠더, 장애에 따른 차별로 점철된 자본주의가 목을 조르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당신’의 존재는 의도적으로 희부옇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경계를 지우는 모호함이다. 명상 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한 글을 따라 읽다 보면 결국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우리는 지구와 새롭게 관계 맺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일이야말로 그 답을 찾아나가는 여정이다.
작가들
앙투안 볼로딘 지음, 조재룡 옮김, 워크룸프레스 펴냄
“낱말들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말할 것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느끼게 될 혼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 싶다면, 읽기에 앞서 저자에 대해 살펴보기를 권한다. 그는 ‘포스트 엑조티시즘(Post-exotisme)’을 바탕으로 “기존 문학적 경향에서 소외된 소수 문학” “공식 문학과 결별하는 쓰레기 문학”의 필요성을 설파해왔다. 그의 글에는 폭력·부의 불평등·계급 등에 투쟁하는 ‘작가들’이 등장한다. 온몸이 조여들고 찢어지는, 실제인지 환상인지 구별할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힌 작가들은 자신의 글이 이미 망가진 세상을 구원할 수 없으리라는 무력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죽어간 이들을 위해 ‘계속 말하고 쓴다’. 저자를 작품 속 작가들의 현신으로 보아도 무리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긍정의 말들
박산호 지음, 유유 펴냄
“엄마는 어마어마한 긍정주의자잖아.”
살다 보면 긍정과 낙관에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일이 생각처럼 안 풀릴 때, 계속해도 되는지 자신이 없을 때 긍정적인 태도는 삶을 지탱하는 주문이 되기도 한다.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저자가 전하는 ‘긍정의 말’들은 대책 없는 ‘파이팅’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바로 긍정’이라는 걸 알려준다. 긍정적인 사고를 하도록 이끌어준 책 속 ‘백 개의 말들’도 함께 소개한다. 무릎이 조금 풀릴 것 같은 순간에도 상황을 직면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오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그렇게 살자고 다짐하게 된다. 바로 저자처럼 말이다.
뉴욕의 감각
박주희 지음, 다산북스 펴냄
“어답트 벤치에 분노와 혐오, 악이 담긴 메시지는 없다.”
10년 차 뉴욕 생활자, 15년 차 아트디렉터가 도시 뉴욕의 장소와 문화를 큐레이팅했다. 유학생 남편을 만나 갑자기 시작된 뉴욕 살이, 거기서 저자는 예술의 세계에 눈뜨고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한다. 갤러리 디렉터가 된 지금의 저자를 만든 것이 도시 뉴욕이었다. 도시의 모든 걸 몸과 마음에 새긴 뒤 ‘뉴욕의 감각’은 자산이 되었다. 도시의 풍경을 만드는 공간과 장소, 미술관과 박물관, 라이프스타일, 음식 등에 대한 소개를 큼직한 사진과 함께 따라가다 보면 알차게 뉴욕 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의례를 통한 저항
스튜어트 홀·토니 제퍼슨 엮음, 임영호 옮김, 컬처룩 펴냄
“‘청년 하위문화’는 사회적·문화적 삶의 지형 위에서 모습을 갖춘다.”
1975년 처음 발간된 문화 연구의 고전이다. 오늘날 전 세계 청년문화의 뿌리 중 하나인 전후 영국의 청년 하위문화를 다뤘다. 한국에도 익숙한 스킨헤드족부터 모드족, 테드족 등 당시 기성 세대를 당혹하게 만든 ‘신세대’의 특성과 정신세계를 파고들었다. 이를 영국의 사회 문화적 변동과 연계해 분석한 것은 당시로서 새로운 시도였다. 베트남전 반대 시위와 밥 딜런 투어처럼, 같은 해 벌어진 정치적·문화적 사건이 서로에게 끼친 영향을 유추할 수 있다. 마약의 문화적 의미를 짚은 장이 특히 흥미롭다. 실제 ‘문화적 마약 이용자’의 인터뷰를 삽입해 이들의 정신세계를 연구했다. 책을 쓴 영국 버밍엄 대학 현대문화연구소의 젊은 연구자들은 이후 세계적 학자로 성장했다.
시사IN 편집국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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