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화염산 같은 여름, 파초선 같은 박물관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2024. 7. 31. 02: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중앙박물관 이태희 연구관


팔백리에 걸쳐 불길이 이글거리는 산을 앞에 두고 삼장법사 일행은 천축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서유기'의 명장면, 손오공과 우마왕의 일전은 여기서 시작된다. 서유기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의 여행을 모티브로 불교와 도교, 민간의 설화 등을 엮어 만든 소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화염산은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루판에 실제로 존재한다. 소설에서 묘사된 것처럼 불길이 치솟는 곳은 아니지만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의 붉은 산주름에 이곳의 혹독한 여름더위가 더해져 '화염산'으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 산 앞에 삼장법사와 세 제자의 동상이 있어 '서유기'에서 그 이름을 따온 듯하지만 이미 그전부터 사람들은 이 산에서 불의 기운을 느꼈다. 당나라 시인 잠삼은 이 산을 지나며 "붉은 화염은 변경의 구름을 사르고 뜨거운 기운은 변방의 공기를 달군다"고 했다.

중국에서 더위하면 난징, 우한, 충칭 3대 불가마를 꼽지만 온도로만 보면 화염산이 있는 투루판이 으뜸이다. 여름 평균기온이 40도, 최근에는 81도까지 찍었다고 하니 여름 한철만큼은 도시 전체가 사우나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한때 고을이름을 '화주'(火州)라고 했을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리던 비도 증발해버릴 정도로 몹시 건조한 탓에 햇볕을 피해 그늘로 숨으면 그나마 견딜 만하다.

투루판은 동과 서를 잇는, 이른바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도시 가운데 하나다. 도시 북쪽에 있는 톈산산맥 봉우리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린 물은 이 도시를 풍요로운 오아시스로 만들어줬다. 자급자족하고도 남을 정도로 농산물을 생산한다. 특히 포도 재배의 최적지로 오래전부터 이름을 날렸다. 2010년 이탈리아를 제친 이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포도를 생산(1억5000만톤)하는 나라가 됐는데 10% 정도가 이곳 투루판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 상당량은 건포도로 가공돼 세계에 수출된다. 투루판을 여행하다 보면 흙벽돌로 만든 포도건조장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뜨겁고 건조한 기후가 포도의 생장은 물론 가공에도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기후는 이곳에서 산 사람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해줬다. 투루판의 아스타나 카라호자 무덤군은 3세기부터 8세기까지 이곳에 산 사람들의 공동묘지다. 500기 넘는 무덤에서는 미라가 된 시신과 다양한 부장품이 발견됐다. 어떤 무덤에서는 망자에게 올린 빵과 과자까지 썩지 않은 채 발견됐다. 부장품 중엔 종이문서를 재활용해 만든 것이 적지 않은데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도 이곳에서 나온 시신의 깔개에서 문서를 떼어내 공개하기도 했다. 행정·군사문서부터 거래계약서까지 다양한 문서는 기존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는 당시 삶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 중에는 당나라 때인 710년 필사한 '논어정씨주'(論語鄭氏注)란 책도 있다. 공자와 제자들의 문답인 '논어'는 오래전부터 학교의 수업교재로 사용했다. '논어정씨주'는 후한의 학자 정현이 '논어'에 주석을 단 것이다. 책을 베껴 쓴 이는 마지막 장에 '복천수'(卜天壽)란 자신의 이름과 함께 시를 한 편 남겼다.

'오늘 글쓰기를 마쳤으니 선생님께서는 더디다 꾸짖지 마세요. 내일은 쉬는 날이니 학생들을 일찌감치 돌려보내 주시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생들의 마음은 똑같은 모양이다. 방학을 맞아 박물관에는 어린이 관람객이 부쩍 늘었다. 시대와 왕조, 역대 임금과 주요 사건 등등. 물론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무더위로 살짝 학업을 내려놓는 때이니만큼 박물관이라는 공간을 즐기고 눈길이 가는 전시품을 마음에 담아가는, 혹은 뮤지엄숍에서 추억거리를 찾아 쇼핑하는 조금은 가벼운 그런 여행은 어떨까. 화염산의 불길을 잠재우듯 박물관 관람이 무더운 여름 박물관을 찾는 모든 분에게 시원한 휴식을 안겨주는 파초선이 됐으면 좋겠다.(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