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서 안 된다? 그럼 남장을 하면 되죠
1950~60년대 유행했던 ‘여성 국극’을 소재로 한 네이버웹툰 ‘정년이’가 이달 초 국내 최고의 만화 축제인 부천만화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오는 10월부터 방송된다. 원작자 서이레·나몬 작가는 “전쟁 직후 모든 것이 무너진 환경 속에서도 창극이 인기를 얻고, 그 무대에 서는 배우들이 모두 여성이었다는 게 신선해 국극을 소재로 택했다”며 “당대 여성들이 꿈꾸는 모습을 극을 통해 표현한 것처럼 우리 작품도 자신들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의 모습을 다뤘다는 점 때문에 많은 분이 사랑해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정년이’는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소리만큼은 타고난 소녀 윤정년의 여성 국극단 입성과 성장기를 그린 작품이다. 남자 역할까지 모두 여성 배우들이 맡는 ‘여성 국극’이라는 소재의 독특함과 함께 매력적인 그림체로 팬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2019년 연재를 시작해 2022년 완결될 때까지 4년 내내 인기몰이를 했다.
최근 만난 두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화려한 꽃을 연기한 여성들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시대는 1950년대 6·25전쟁 휴전협정 3년 후인 1956년. 전남 목포 출신으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정년은 특기인 창을 통해 부자가 되려고 국극단에 들어온다. 스토리 담당인 서 작가는 “여성들이 하고 싶고 되고 싶은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실천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면서 “남아 있는 사료가 별로 없어 화석을 찾는 기분으로 연재 기간 내내 작업했다”고 말했다. 여성 국극은 1960년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대중들의 시선에서 점점 멀어졌고, 후진 양성을 하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두 사람은 1세대 여성 국극 배우들의 사진과 각종 논문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구성했다.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난 배우들의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순간도 많았다. 서 작가는 “작품에서 남자 역할 톱 배우로 나오는 ‘문옥경’이 팬과 함께 예식장에서 결혼 사진을 찍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실제 국극 배우로 활동했던 고(故) 조금앵 선생이 자신의 팬과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스토리를 구성했다”고 했다. 작품 속 국극 단장인 ‘강소복’ 캐릭터는 한 논문에서 “여성 국극의 왕자 임춘앵 선생은 예인으로서 자존심이 강했지만 극단 운영에 관심이 없었다”는 문장이 나오는 것에서 착안했다. 서 작가는 “제한된 자료를 바탕으로 상상을 더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고민해가며 작품을 진행했다”고 전했다.
그림도 쉽지 않았다. 나 작가는 “저는 작업할 때 스케치업 3D 프로그램을 통해 50년대 배경과 국극 무대 구현했는데, 당시의 시각적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힘들었다”며 “사극과 여성 국극에 관한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서 당시에 해당되는 의복들을 가져와 무대에 올려보는 등 자는 시간 빼고 모든 시간을 작품을 위해 썼다”고 했다.
데뷔 10년 차 스토리 작가인 서이레 작가는 중학생 때부터 인터넷 소설을 썼다. 해리포터 시리즈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 쓴 이른바 ‘팬픽’을 연재하며 작가의 꿈을 꿔왔다. 한동안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내 작품이 정말 인기가 없었다. 총 10편을 연재했는데 ‘재미있다’는 댓글이 하나 달렸다”며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렜고, 그 사람을 위해 더 열심히 했다. 그때 내 꿈은 글쟁이가 됐다”고 했다.
나 작가는 고등학생 때부터 영상·연출에 관심이 많아 영화감독을 꿈꿨다. 하지만 숫기가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화가’로 진로를 변경했다. 이 작품이 첫 데뷔작. 영화를 구상하면서 꾸준히 인물과 배경을 스케치하고 장면을 상상하는 훈련을 해온 것이 도움이 됐다. 나 작가는 “영상처럼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감정 표현과 몸짓들을 그림으로 그려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었다”며 “이번 데뷔작을 시작으로 작품에 대한 사랑과 그림에 대한 향상심이 끊이지 않는 ‘행복하게 오래 그림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의 취향은 다르다. 서 작가는 ‘범죄 스릴러’를, 나 작가는 ‘코믹 시트콤’이 꿈. 서 작가는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처럼 범죄 사건에서 일어나는 긴장감과 얽힌 사연들을 풀어내고 싶다”고 했고, 나 작가는 “2000년대 붐이었던 피식피식 웃을 수 있는 코믹 시트콤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정년이’는 김태리가 주연을 맡고 신예은, 라미란, 문소리, 정은채 등이 출연한다. 실력 있는 여성 배우들의 등장이 예고되면서 벌써부터 기대를 모은다. 두 사람은 “김태리 배우를 보는 순간 ‘윤정년’인가 생각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나 작가는 “김태리가 맡았던 영화 ‘아가씨’의 숙희 모습을 보면, 당차면서도 설익었고 다듬어지지 않은 이미지가 윤정년과 빼닮았다”면서 만족해했다.
또 “‘정년이’에는 질투심에 불타는 ‘영서’라는 인물도 등장하는데, 발랄하고 톡톡 튀는 느낌의 신예은 배우가 그 역할을 소화하는 모습을 촬영장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서 작가는 “옥경이 역할을 한 정은채 배우는 극중 남자 역을 소화하는 것을 넘어 실제 왕자님으로 보일 정도”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저희가 만든 이야기가 배우들을 통해 어떤 작품으로 탄생할지 우리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서이레·나몬
서이레(①) 작가는 2015년 두 여성의 창업 성공기를 담은 웹툰 ‘보에’를 시작으로 ‘소녀행’(2017) 등 주로 여성 서사를 소재로 이야기를 구상하는 글 작가다. 나몬(②) 작가는 ‘정년이’(③) 연재가 시작된 2019년 데뷔했다. 현재 입시 스트레스를 소재로 한 청소년 스릴러 ‘자멸기관’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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