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걷고 먹는 철원 여행

2024. 7. 30.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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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살짝 밀어주는 것
한탄강과 잔도길이 머무는 길

철원에 다녀왔다. 열심히 걷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주상절리길이 있는데 벼랑을 난 잔도길을 따라 걷는 기분이 더없이 좋다. 세찬 물소리가 함께 하며 귀를 씻어준다. 철원에 많이 있는 맛 좋은 막국숫집은 걷고 나서 가볼 만하다.

(위)주상절리를 따라가는 잔도길 (아래)고석정 정자에서 바라본 풍경
마음이 힘들 땐 걷는다. 사무실 주변을 걷기도 하고, 때론 걷기 좋은 길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걷는 것이 당면한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회의와 이메일과 반복되는 수정이다.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 다리가 아프도록 걷다 보면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가 되고, 뒤틀린 심사가 조금은 풀리기도 한다. 폭식과 숏폼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보다 걷기가 훨씬 낫다.

내가 사는 곳은 파주지만 일부러 철원까지 갔다. 행정구역상 강원도지만 파주에서 철원까지는 자동차로 한 시간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강남 가는 것보다 수월하다. 차도 막히지 않는다. 수도권순환고속도로와 국도를 타고 구불구불 가면, 교과서에서 봤던 백마고지와 노동당사가 있는 철원이 나온다. 거기에 한탄강 주상절리길이 있는데 언젠가 TV에서 보고는 꼭 한 번 걸어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마침 시간이 나 주저 없이 철원으로 차를 몰았다.

한탄강에서는 래프팅도 즐길 수 있다.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불리는 한탄강.
거칠고 투박한 화산강의 성격, 한탄강
파주 서쪽으로 임진강이 흐른다. 임진강은 한강과 합류해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임진강은 북한에서 발원해 철원과 포천을 지나는 한탄강과 연천에서 합류해 그 깊이와 넓이를 키운다. 언젠가 연천 인근의 한탄강을 찾은 적이 있는데, 한강이나 낙동강, 섬진강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꼈다. 뭐라고 할까, 더 거칠고 투박했다고 할까. 강이 주는 아늑함이나 고요함은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보는 맛은 장쾌해서 가슴이 열리고 머릿속이 환하게 트이는 것 같았다. 물소리는 세차고 우렁차서 고구려 군사들의 함성처럼 들린다는 상상을 했던 것도 같다. 왜 이럴까,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비로소 조금은 이해가 됐다. 인터넷 백과사전은 한탄강이 내륙에서 유일한 화산강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화산강의 특징으로는 깊고 가파른 협곡과 현무암 주상절리, 하식동굴, 용암대지 등을 들 수가 있는데 한탄강은 이런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절벽은 거인이 손톱으로 할퀸 것 같기도, 날카로운 끌로 긁어놓은 것 같기도 했는데, 이는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침식지형이었다.

한탄강은 화산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탄강이 만들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50만 년 전이다. 북녘땅 평강군 오리산이 폭발, 엄청난 양의 마그마가 분출했다. 뜨거운 마그마는 철원과 포천, 연천을 지나 파주, 문산까지 100킬로미터 이상 흘러왔다고 한다. 이 지역의 현무암들은 이 마그마가 식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 용암대지에 한탄강이 이리저리 파고들며 주상절리가 만들어졌다. 한탄강(漢灘江)이란 이름도 ‘큰 여울이 많은 강’이라는 뜻인데, 국내 유일의 현무암 협곡으로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7월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됐다.

자, 일단 걸어보자. 트레킹은 두 군데 지점에서 시작할 수 있다. 강원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 드르니마을 매표소와 순담매표소인데, 나는 드르니마을 쪽으로 들어가 순담매표소로 나오기로 했다. 드르니마을은 ‘왕이 들렀다가 간 마을’이라는 뜻이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피신할 때 이 마을에 들렀다가 나갔다고 한다. 트레킹이라고 하지만 잔도를 따라 걷는 길이라 어렵지 않다. 아이들 손잡고도 갈 수 있고, 조금 과장하자면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고 서류 가방을 들고도 걸을 수 있다.

주상절리를 따라가는 잔도길
세상만사 작게 만들어버리는 공간의 경이
50만 년 전 마그마가 흘러간 흔적을 따라 걷는다는 것, 약간은 신비로운 기분이 든다. 50만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은 길어야 고작 80년을 사는 인간으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 시간이다. 조금은 딴 이야기지만, 브라질 이구아수 폭포의 굉음 앞에서, 벌룬을 타고 항해한 터키 카파도키아의 새벽 앞에서, 생각보다 거대했던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나는 숨 막히는 경이를, 또 허무의 감정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 그 허무의 몇 평이 자리잡음으로써 나는 조금 더 이 삶을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하고 싶다.

여행을 가는 이들에게 꼭 압도적인 풍경 속에 서 보고, 그 속에 선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껴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행에서 경험한 엄청나고 압도적인 공간감이 내 인식과 마음을 상당 부분 확장해 주었다. 집과 도서관, 홍대 거리, 몇몇 카페와 식당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나는 여행에서 만난 ‘비현실적인 현실’ 앞에서 ‘허무의 감각’을 경험했고, 그 감각으로 일상에서의 실수나 자질구레한 사건, 다툼 따위를 ‘에이, 이런 것쯤이 뭐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잔도를 따라가며 한탄강의 비경을 즐겨볼 수 있다, 잔도길을 따라 걷는 여행자들.
나는 지금 웅장한 현무암 협곡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다. 벼랑은 누군가 일부러 꽂아놓은 듯 수직으로 서 있다. 50만 년 전에 생긴 현무암과 1억 년 전에 생긴 화강암이 섞여 있다고 한다. 걷다 보면 ‘나는 지금 허공 위를 걷고 있구나’ 하는 걸 깨달을 때가 있다. 길이 곡선으로 펼쳐진 구간에서 전방이 보이는데, 이 길이 바로 ‘잔도’(棧道)다.

잔도는 절벽에 구멍을 낸 후, 그 구멍에 받침대를 넣고 받침대 위에 나무판을 놓아 만든 길이다. 중국에서 외진 산악 지대를 통과할 때 이런 길을 만들었는데, 주로 친링산맥(중국 산시성 남부에 있는 산맥)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걷다 보면 약간 아찔한 구간도 나온다. ‘순담스카이 전망대’는 잔도에서 벼랑을 끼고 허공으로 철제 로프를 매달아 반원형을 길을 낸 곳이다.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는 스카이워크
바닥이 유리라 발아래로는 굽이치며 흘러가는 한탄강 물이 빤히 내려다보인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털이 곤두선다. 좁고 가파른 협곡인 까닭에 물살이 세다는 점도 스릴을 더한다. 절벽 사이를 잇는 잔교는 모두 13개이다. 사람이 몰릴 때는 출렁이는 것도 느낄 수 있다. 13개의 잔교 이름은 주변의 지질 구조에 따라 지었는데 예컨대 ‘돌개구멍교’에선 강물에 쓸려온 자갈이 기반암에 뚫어 놓은 돌개구멍이 보이고, ‘수평절리교’ 건너편에는 길쭉한 합판 모양의 지층이 켜켜이 쌓인 수평절리가 보인다.

한탄강 잔도는 지상에서 20~30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길이 3.6킬로미터나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해외의 여느 명소와 비교해도 그 풍경이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종착점이다. 만보계를 보니 9,000보 정도 된다. 딱 기분 좋은 정도의 길이지만 조금 더 길었다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붕붕대는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짜증 섞인 높은 언성 속에 시달리다가 물소리 새소리에 귀를 씻고 나면 또 한 달 정도는 그럭저럭 버틸 힘이 생긴다. 이게 여행이 주는 힘이 아닐까.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찾고 깨닫기 위해 여행을 떠나던 시대는 지났다. 그런 여행은 마르코 폴로와 혜초, 바스쿠 다가마, 류시화가 이미 했다. 지금의 우리는 여행을 가서 조금 낯선 걸 즐기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푹 쉬다가 오면 되는 것이다.

풍전면옥의 막국수, 풍전면옥의 수육
막국숫집으로 온 것도 이 때문이다. 기분 좋게 걸었다면 다음엔 맛있는 걸 먹을 때다. 내가 여행을 하는 방식이다. 좋았던 기분이 한 단계 더 좋아진다. 주상절리길을 걷기 전부터 꼭 먹어야지 했던 막국숫집으로 왔다. 철원도 위도가 높은 고장답게 이름난 막국숫집이 많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막국수도 이 집에서 직접 뽑은 메밀면으로 만들었다. 거뭇거뭇한 메일 껍질이 면에 박혀 있다. 수육도 하나 시켰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막국수만 달랑 먹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막국수 한 그릇과 수육 몇 점을 먹고 나니 세상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다음엔 어디로 갈까, 고석정도 있고 노동당사도 있고…. 고민하다가 소이산 전망대로 가기로 했다. 앞서 많이 걸었으니 또 걷기는 싫다는 것도 소이산 전망대를 택한 이유다. 소이산은 해발 362미터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주변에 더 높은 산이 없어 경관이 좋다. 전망대가 만들어진 이유다.

소이산 전망대 오르는 모노레일
이곳은 한반도 내륙에서 관찰되는 유일한 용암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철원평야와 옛 시가지의 흔적, 휴전선 넘어 북한 땅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용암대지는 용암이 흘러 들어와 넓게 퍼지면서 낮은 곳을 메꾸어 생긴 땅을 일컫는다.

옛 철원역을 재현한 곳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는데, 울창한 숲을 내려다 보며 슬금슬금 오르는 기분이 좋다. 옛 철원역 주변으로는 옛 철원금융조합과 강원도립철원의원, 철원극장, 철원보통공립학교 등 옛날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젊은 여행자들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나는 아저씨라 패스.

승강자에 내려 200미터 정도 데크길을 따라 올라가면 전망대에 도착한다. 정상에 서면 교과서가 펼쳐지는 것 같다. 백마고지가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깝다.

(위)소이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철원평야 (아래)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풍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정상 전망대에는 문화해설사가 상주해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는데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의해 10여 일간 지속된 전투는 30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고 고지 주인은 무려 20번이 넘게 바뀔 만큼 치열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3,000여 명, 중공군 1만 4,000여 명이 전사했다. 백마고지 동쪽엔 또 다른 격전지 아이스크림 고지가 있다. 높이가 223미터였으나 집중 포격으로 표고가 3미터나 깎여 나갈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커피를 마신다. 신기하게도 손님이 직접 맷돌에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시는 카페다. 주인이 내려주는 커피가 좋지만, 그래도 이왕 들어왔으니 한 번 해본다. 맷돌을 갈면서 ‘음, 이렇게 하면 주인이 수고를 상당히 덜 수 있겠군. 맛이 없어도 ‘손님 책임이에요’ 해버리면 그만일 테니 아주 영리한 방식이군’ 하고 생각하지만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일. 카운터에서 주인이 원두를 잘 갈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으니 성실하게 맷돌을 돌릴 수밖에 없다.

(위로부터)모노레일을 타고 소이산 전망대까지 오른다(맨위사진). 소이산 전망대를 찾은 여행객들(중간 사진), 옛 철원역을 재현한 곳(맨아래사진)
뭐 어쨌든 커피는 무사히 맷돌을 거치고 드립 용지를 빠져 나와 머그잔에 담겨 있다. 맛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커피를 마시며 이번 여행은 꽤 괜찮았고, 철원이 상당히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인간이란 이렇게 단순하다.

일과 생활에 지친 아저씨 하나가 있었는데, 시니컬하고 감상적이었던 그 아저씨는 여행을 와서 고작 만 보를 걷고, 막국수 한 그릇에 수육 몇 점을 먹었을 뿐이데 다시 유쾌한 아저씨가 된 것이다. 여행은 이처럼 우리 어깨를 두드리고 등을 살짝 밀어준다.

맷돌로 커피 원두를 간다. 철원에서 맛본 맷돌 커피.
Tip. 한탄강 잔도길을 걸을 경우 차를 가져간다면 순담이나 드르니 매표소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반대편까지 걸은 뒤 택시나 순환버스를 이용해 시작한 곳으로 돌아오면 된다.
철원 여행 정보
풍전면옥의 막국수
철원에는 막국수를 잘하는 집이 많다. 풍전면은 직접 면을 뽑는데, 메밀국수 특유의 묵직한 맛이 살아있다. 고석정은 철원을 대표하는 풍경. 순담매표소에서 차로 십여 분 거리에 있어 들러볼 만하다.

강 한가운데 10여 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암이 우뚝하게 솟아 있다. 조선시대에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3대 도적이라고 명명되었던 임꺽정이 활동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작은농업전시관에서는 옛날 농기구를 전시해놓았다.
고석정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작은 농업전시관’ 호미뜰은 철원 지역 농민들의 손때 묻은 농기구와 생활 도구 등을 전시 중인 공간이다. 호미뜰은 ‘농부의 방’, ‘농부의 창고’, ‘농부의 부엌’, ‘농부의 사진관’ 등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전에 민통선 안쪽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출입증을 걸어 놓은 모습 등 철원 지역의 농사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농부의 사진관’이 특히 눈길을 끈다. 그 시절 농민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농부의 방’도 볼 만하다.

[글과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40호(24.07.30)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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