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탄핵과 협치
거의 모든 한국의 언론에 최근 자주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탄핵이 있다. 특히 대통령 탄핵을 한번 경험한 까닭에 이 단어가 담고 있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대통령과 행정부에 권력 집중이 두드러지고 권위주의적 유산이 남아 있는 브라질에서도 1992년 콜로르 대통령에 이어 24년 만에 지우마 대통령이 탄핵소추되었다. 물론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이를 동반했다. 이런 브라질과 비교해 보아도 더 짧은 기간에 다시 대통령이 탄핵당한다면 한국 사회가 겪을 혼란의 정도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2017년 12월 탄핵당한 박근혜 대통령과 2016년 여름 탄핵당한 브라질 지우마 대통령의 탄핵은 둘 다 여성 대통령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당시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탄핵이 이뤄진 정치·사회적 배경은 사뭇 다르다. 전자는 보수진영, 후자는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탄핵은 한 나라의 정치·사회가 심하게 양분되어 갈등이 극단적으로 치달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맞은 탄핵위기에 자진 사임한 닉슨 대통령처럼, 탄핵에 이르지 않고 해결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이는 권력의 속성상 오히려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 탄핵의 요건과 절차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인 절차에 따른 대통령 징계나 파면은 상당히 어려운 까닭에 한국도 국회와 헌법재판소가 관여하는, 고도의 법적이자 정치적인 절차를 거치게 되어 있다.
총리를 불신임할 수 있는 내각책임제와 달리 대통령중심제를 택한 대부분의 나라가 탄핵 조항을 헌법에 명시한 이유는 권력이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정치적 상황이 낳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탄핵제도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표적물을 쏘아(彈) 잘라낸다(劾)’는 탄핵의 뜻도 그렇지만, 탄핵의 라틴어 어원인 ‘족쇄를 채운다(impedicare)’에서 더 잘 드러난다.
제왕적인 대통령이라는 표현처럼 권력의 과도한 집중이 낳은 폐해를 이미 수차례 경험하고 한 차례 대통령 탄핵도 있었지만, 한국적 상황에서는 내각책임제가 더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이유로 대통령중심제를 택했다. 4·19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의 실패를 한 예로 든다. 그러나 이는 60여년 전의 일인 데다 시행 기간도 너무 짧아 오늘날 내각책임제의 부적합성을 입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국회서 권력구조 개혁 의문
그러나 2017년의 탄핵정국을 둘러싼 전 사회적 갈등 그리고 지금 다시 일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논의는 순전히 대통령의 자질 문제인지, 아니면 대통령중심제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권력구조의 문제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다. 그래서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위한 대안으로 내각책임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지난 대선에서 0.73%포인트 차이로 신승했지만, 승자독식을 가능하게 만든 대통령중심제의 문제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중심제의 행정부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여소야대의 22대 국회가 다시 등장한 까닭에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사회의 파열음은 이제 거의 일상화되었다. 입법부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이 이미 15차례나 행사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된다면 과연 정상적인 정치가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이 따라서 제기된다.
권력의 형태와 속성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연구했던 계몽기의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권력을 손에 쥔 모든 인간은 이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이를 악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권력의 상호견제를 보장할 수 있는, 입법과 행정 그리고 사법의 삼권분립을 <법의 정신>(1748)에서 강조했다. 입헌군주제와 귀족의 역할을 중시했던 그의 사상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권력에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 후 공화정치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이런 정신이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명시되었건만 1972년의 유신체제는 대통령의 권력이 행정부를 넘어 의회와 사법의 영역까지도 완전히 점령한 흑역사를 기록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87년 체제’ 아래서 청와대로 상징되는 권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태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대한민국 정치 1번지가 된 ‘용산’이 정치 실종의 원인 제공자라는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 탄핵이라는 단어가 다시 뉴스를 장식하게 되었다.
‘87년 체제’의 산물인 현행 헌법도 그동안 다양해진 생활세계의 변화에 따라 일정한 정도의 손질을 가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시대 변화에 따른 권력구조의 개편과 관련, 현재의 대통령 5년 단임제 대신 미국처럼 4년 중임제를 선호하는 개헌 논의도 많다.
모든 제도에는 장단점이 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오랫동안 운영되고 있는 권력구조가 한국 사회에서 그대로 통할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여기에 참여하는 사회 성원이 그 시대의 과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식과 의지, 그리고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소추 청원을 둘러싼 국회 청문회의 많은 장면이 이런 의식과 의지, 그리고 능력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청문회 내내 ‘상대방이 말할 때 끼어들지 말라’는 위원장의 주의 경고의 목소리가 고함과 소란 속에 파묻히는데도 ‘숙의(熟議)민주주의’까지 이야기하는, 이상한 나라의 국회다. 이런 국회가 앞으로 과연 권력구조의 합리적인 개선이나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탄핵과 협치 사이, 이젠 결단 필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한국의 정치권에서 통치 대신에 여야를 막론하고 ‘협치(協治)’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 국어사전에 아직 없는 이 단어의 뜻을 단순하게 ‘협력하는 정치’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지만 여야가 밖으로 내세우는 명분용의 어휘로 이미 굳어진 것 같다.
또 이 협치를 국가가 여러 업무를 관리하기 위해 정치, 경제 및 행정의 권한을 행사하는 일과 시민과 여러 집단이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면서 서로의 견해 차이를 조정할 수 있는 기구와 과정을 포함하는 제도를 의미하는 ‘거버넌스(Governance)’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우리는 권력과 통치, 그리고 지배와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만 보통 이를 구별해 쓰지는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 막스 베버는 <경제와 사회>(1921)에서 권력을 ‘하나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저항에 맞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모든 기회’로 비록 형체는 없지만, 역동적인 것으로 보았다. 반대로 지배는 ‘규정된 내용에 사람들이 복종하게 하는 기회’이며, 권력과 달리 지속적이라고 규정했다. 이와 달리 그는 통치를 넓게는 정치, 좁게는 행정이나 관료제도와 거의 동의어로 이해했다.
이런 권력이나 지배 또는 통치든지, 아니면 지금 흔히 이야기되는 협치든지, 더 나아가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거버넌스든지 문제의 핵심은 누가 어떻게 오늘날 정치생활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의 열쇠는 결국 깨어 있는 국민이 쥘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정신이 바로 선다면 탄핵이 협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협치를 추동시킬 수 있다. 면피용의 협치를 이야기하는 대신에 진정성이 담긴 탄핵 논의는 무관심이나 혐오의 대상이 된 정치에 오히려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감정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이 둘을 통합하고 싶어 하지만, 이 둘을 통합할 수 없고, 그를 괴롭히는 회의와 불안만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괴테의 비극 <클라비고>(1774)에 나오는 대사처럼 탄핵과 협치 사이에서 이제 어떤 결단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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