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의 증언자…국제민중법정서 미국의 책임 반드시 물을 것”[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정유진 기자 2024. 7. 30.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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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이 지난 15일 경남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 부지 내에 세워진 위령각 앞에 서 있다. 일본 불교단체 ‘태양회’의 성금으로 세워진 이 위령각에는 원폭 피해자 1162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일본에 강제동원된 부모 밑에서 1943년 1월9일 태어났다. 출생지는 히로시마 에바마치 251번지. 1945년 8월6일 미국이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하면서 방사능에 피폭됐다. 그가 사는 경남 합천은 강제동원된 피폭자가 많아 ‘한국의 히로시마’라 불린다. 그는 2001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역 지부장을 맡아 원폭 피해자들의 힘겨운 삶과 고통을 20년 넘게 지켜봐왔다. 현재 미국에 원폭 투하 책임을 묻기 위해 준비 중인 원폭국제민중법정의 원고로 참여하고 있다.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할 때마다 그는 늘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번은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기 위해 합천 지역 국회의원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또 한번은 특별법을 놓고 누군가와 논쟁 중에 전화를 받은 것인지 수화기 너머 울분에 찬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든이 넘은 그는 아직도 쉴 새 없이 자신을 혹사하고 있었다.

지난 15일 경남 합천원폭자료관에서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81)을 만났다. “저는 이제 살날도 많지 않고,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죽기 전에 국가가 외면해온 원폭 피해자들의 역사를 제대로 남기고 싶어요. 조선인들이 어떻게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원자폭탄을 맞게 됐는지, 그 후 어떤 고통 속에 살아왔는지 말입니다.”

그는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미국 책임을 묻기 위해 열리는 원폭국제민중법정에 원고로 참여하고 있다. 원폭국제민중법정은 2000년 일본의 위안부 범죄에 유죄 판결을 내린 ‘여성국제법정’처럼 시민 차원에서 열리는 법정이라 법적 구속력은 없다. 다만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이 문제를 실제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이 목표다. 2026년 미국 뉴욕에서 개최될 예정이고, 현재 국내 시민단체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과 강우일 주교(천주교 제주교구)를 비롯한 한국·유럽·일본의 학자·법률가·시민사회 인사들이 힘을 모아 준비 중이다. 그는 “핵무기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그걸 맞아본 사람이 가장 잘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이런 무기가 지구상에 있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고 가야 하는 게 나의 의무”라며 “이를 위한 첫 단계는 이제까지 한번도 원폭 투하 책임을 인정한 적 없는 미국의 사죄를 받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8월6일은 미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지 79년째 되는 날이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 자료에 따르면, 원폭 피해자 74만명 중 10만명이 조선인으로 추정되며 그중 70~80%는 합천 출신이다. 조국이 해방된 지 79년이 흘렀지만, 원폭 피해자들의 총칼 없는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합천에 강제동원령…가난한 사람들만 가족들 먹여살리려 떠났다 원폭에 희생
조선인 피폭자들 제대로 치료조차 못 받고 귀국한 뒤 원인 모를 피부병 등 후유증에 시달려
일본은 지자체 차원서 2·3세 피해자 지원하는데 한국 정부는 추모 막대기 하나 세운 게 없어
핵무기가 왜 없어져야 하는지 알리는 게 내 의무…피해자들의 고통 ‘역사’로 남겨야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된 후 히로시마에 피어오른 버섯 구름.

- 1943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고, 세 살 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해 피폭되셨죠. 부모님 고향은 원래 합천인데, 어떻게 히로시마에서 태어나시게 됐나요.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합천 지역에 강제동원령이 내려왔습니다.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 사랑방에 모여 누굴 보낼지 추첨을 했다고 해요. 먹고살 만한 사람들은 추첨에 걸려도 다 안 갔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가족 먹여 살리려고 쌀 몇되 받고 대신 가고 그랬죠. 저희 아버지가 딸만 일곱인 집안의 2대 독자였는데, 일본어에 능통하다보니 1941년 결국 강제동원이 되셨습니다. 강제동원된 합천 사람 대부분은 군수품 공장이 있던 히로시마에 배정됐어요. 어머니도 군수품 공장에서 탄약 상자 짜는 일을 하셨고요. 그렇게 저는 1943년 히로시마 에바마치 251번지에서 태어나게 됐습니다.”

- 원폭 투하 당시 기억이 나시나요.

“우리가 살던 집은 피폭 중심지에서 약 3.5㎞ 떨어진 곳이었는데, 워낙 어렸을 때라 기억은 잘 안 납니다만 당시 참혹한 상황은 말로 다 설명 못하죠. 어떤 분은 원폭 투하 19일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죽기 전 ‘야야, 내 눈이 이상타. 내 눈 좀 봐도’ 하시더래요. 봤더니 눈에서 구더기가 흘러나오고 있더랍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자를 다리 밑에 데려와 돌보다 한국에 돌아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거기 놔두고 왔다며 두고두고 안타까워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도 1945년 말 만삭의 몸이던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돌아왔어요. 조선인이 일본에 계속 남아 있으면 죽임을 당할 거란 소문이 돌았고, 히로시마가 폐허가 되면서 먹고살 길도 없었으니까요.”

사실 피폭 재일 조선인들에게 서둘러 고국으로 귀환하는 것은 당연한 선택지가 아니었다. 가산을 정리하고 귀국에 필요한 선박을 알선하는 일은 단기간 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고, 특히 부상을 입은 피폭자들은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다. 히로시마 원폭과 피폭 역사에 대해 연구한 오은정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재조 일본인의 송환을 원활히 하기 위해 빨리 재일 조선인을 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승전국 미국의 귀환 정책에 따라 당시 조선인은 급박하게 돌아가야 했다”고 지적했다. 오 교수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합법화된 (좌익 계열) 조선인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미 점령군의 우려가 커지면서 조선인 귀환을 서둘러 추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고 전했다.

- 고국에 돌아온 후는 어떠했습니까.

“사실 고초로 따지면 한국에서 더했죠. 처음엔 죽은 줄 알았던 친인척이 살아 돌아오니 다들 반가워했는데, 한국에 있던 사람들도 먹고살 게 없는 건 똑같았으니까. 나무껍질 벗겨 먹고, 풀 뜯어 먹으면서 연명했어요. 그러다 전쟁까지 터진 겁니다. 전쟁 와중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셨고요. 그때 제가 겨우 아홉 살이었습니다.”

- 피폭 후유증은 없었나요.

“솔직히 한동안은 다들 피폭된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원자력이니 방사선이니 그런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 히로시마에 떨어진 게 그냥 폭탄인 줄만 알았지 원자폭탄인 줄 알았겠습니까.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원인 모를 피부병에 평생 시달렸는데, 약을 써도 듣지 않으니 어릴 때 할머니가 깨진 그릇에 인분을 개어 발라주고 그랬어요. 여기 합천 사람들 후유증으로 고생한 건 말로 다 못합니다. 어떤 분은 피폭당할 때 벌어진 다리의 상처가 죽을 때까지 아물지 않았어요. 피부가 열린 상태에서 계속 고름이 나니까 농사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가난까지 대물림된 겁니다.”

- 다들 한국이나 일본 정부에 지원이나 보상 요구는 생각도 못하셨던 건가요.

“저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몰라서 못했습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으니 밥만 먹으면 지게 지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했어요. 재를 두 개나 넘어서 시장에 나무 몇점 내다 팔아봐야 쌀도 사기 힘든데, 하루하루 풀칠하느라 원폭이니 뭐니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알 만한 사람들이 앞장서줘야 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피폭 사실을 숨겼어요. 괜히 알려지면 (사회적 낙인 때문에) 안 좋은 소문 나서 자식들 결혼마저 어려워지니까요.”

1965년 맺어진 한일협정에서도 조선인 원폭 피해자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1978년에서야 합천군이 원폭 피해자 조사에 나섰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피폭 피해가 심한 사람들은 증언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일찌감치 사망했고, 이미 시작된 이농현상 때문에 합천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 사람도 많았다. 이렇게 원폭 피해 역사의 기록은 첫 단계부터 실패했다.

심 지부장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을 맡은 2001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히로시마’라 불리는 합천 지역 내 모든 원폭 피해자들의 집을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정부가 기록하지 않은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대신 듣고 봐왔다. 고령으로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는 원폭 1세, 그리고 대를 이어 피폭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2·3세들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는 답답함에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히로시마에 강제동원됐다가 피폭당한 어르신 집을 방문해서 왜 아직도 원폭 피해자 등록을 안 했냐고 물으니 아들에게 피해 갈까봐 안 했다는 거예요. 마침 그 옆에 아들이 있길래 몸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합디다. 혹시 해서 간지러운 데는 없냐고 물었죠. 아니나 다를까, 안 그래도 온몸이 가려운데 무슨 약을 먹어도 안 나아서 산에 약초 캐러 다니고 있다는 거예요. 피부병만이 아닙니다. 원폭 2세 중에는 서른 살에 갑자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이란 털은 다 빠져버린 사람도 있고, 3세대 중에도 열아홉 살에 전신 탈모가 된 사람이 있어요. 암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질환도 많습니다. 합천 지역 정신병동에는 멀쩡하게 학교·회사 다니다 갑자기 증세가 나타나서 입원한 2세들이 5명이나 있어요. 하다못해 2·3세들이 진료라도 받을 수 있게 지원해줘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으니, 아직도 자녀에게 피해만 갈까봐 피폭자 등록을 하지 않은 1세대도 있어요.”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원폭 2세들은 일반인에 비해 질병에 걸릴 확률이 3.3~89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016년 제정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1945년 원폭이 투하됐을 때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있었던 사람과 ‘당시 임신 중 태아’로 피해자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 한국 정부는 일본도 원폭 2·3세는 피폭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지원에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 들을 때마다 너무 화가 납니다. 한번은 그런 말 하는 국회의원에게 ‘의원님은 일본 국회의원이냐’고 따지기까지 했어요. 일본은 전범국가라서 ‘피폭자는 어디에 있든 피폭자’라는 오사카 고등재판소 판결에 따라 자국의 2·3세를 피폭자로 인정해주면 전 세계 33개국 2·3세를 똑같이 지원해줘야 하니까 절대 국가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인정 안 해줍니다. 그래도 지자체별로 지원해주고 있어요. 교토에서는 1년에 한번씩 검진해주고요, 도쿄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2·3세대에게 생활 보증도 해준답니다. 한국도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자는 2세까지 지원해주잖아요. 남의 나라 전쟁에서 입은 고엽제 피해는 2세도 인정해주면서, 왜 (강제동원됐다가) 방사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나몰라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이대로 가면 원폭 피해 1세들이 모두 돌아가신 후 흐지부지 묻히게 되는 것 아닐지 걱정이 됩니다.

“그게 문제죠. 우리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역사의 증언자예요. 그런데 한국 정부는 수많은 역사적 질곡 중에서도 유독 원폭 피해만큼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마디로 국적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국 정부는 해방 이후 원폭 피해자 전수조사를 한번도 하지 않았어요. 만약 언젠가 미국이나 일본이 ‘보상해줄 테니까 너네 나라 전체 피해자 명단 내놔봐라’ 할 때 내놓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명단이나 있습니까. 원폭 피해로 한국인이 5만명이나 돌아가셨는데, 그동안 국가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막대기 하나 세워놓은 것도 없어요. 오죽하면 합천에 있는 유일한 위령각이 일본 불교단체인 ‘태양회’가 16년 동안 조금씩 모아서 보내준 돈 5000만원으로 지어진 거겠습니까.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에요.”

심 지부장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미국 책임을 묻기 위해 열리는 원폭국제민중법정에 원고로 참여하고 있다. 원폭국제민중법정은 심 지부장이 2015년 유엔 핵확산금지조약(NPT) 검토회의에 참가해 “이제 피폭자들이 일어서서 다시는 핵무기를 못 쓰게 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 첫 단계는 바로 미국이 자기 책임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연설에서 출발했다.

- 그동안 미국은 원폭을 투하해 한국을 해방시켜준 고마운 존재로 인식돼왔습니다. 이후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에 책임을 묻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됐고요. 심 지부장님은 어떻게 미국의 책임에 주목하시게 됐습니까.

“사실 우리 형님부터도 제가 국제민중법정에 원고로 참여하는 거 안 좋아합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내에도 지지하지 않는 분들이 있고요. 하지만 핵무기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그걸 직접 맞아본 사람이 가장 잘 압니다. 그러니 우리 죽기 전에 이런 무기가 지구상에 있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고 가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미국이 원자폭탄 터뜨려서 해방시켜줬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은 해방됐을지 몰라도 우리 원폭 피해자는 해방이 됐습니까. 그 쇳덩어리 하나가 환경은 물론이고 2·3세까지 대를 이어서 끔찍한 피해를 주는데, 이 지구상에 그런 무기를 두면 안 됩니다. 그러려면 결국 미국이 사죄하고, 먼저 핵무기를 내려놔야 합니다. 미국은 핵무기금지조약(TPNW)에도 가입하지 않았어요. 원폭을 만든 미국, 전쟁을 일으킨 일본, 그리고 두드려 맞은 한국까지 모두 서명 안 했죠. 핵무기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고요. 그러면 NPT니, TPNW니 그런 조약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그의 말처럼 미국은 이제까지 원폭 피해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한번도 인정한 적 없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선언한 공로로 200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6년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그는 18분간의 연설에서 핵무기로 인한 파멸과 참혹함을 강조했지만, 정작 그것을 투하한 주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 미국 원폭 투하의 불법성과 소송 쟁점을 논의하기 위한 국제민중법정 국제토론회가 세계 각계 인사들의 참여 속에 벌써 두 차례나 열렸습니다.

“사실 제가 농사꾼인데 뭘 알겠습니까. 국제민중법정이란 용어도 몰라서 막연하게 ‘세계 재판’을 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만 해왔는데, 상상외로 호응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지난 6월 도쿄에서 열린 2차 국제토론회 때는 청중석에 97세 노인분이 앉아 계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밖에 있던 조선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공원 안으로 이전해준 히라오카 다카시 전 히로시마 시장이셨습니다. 따로 초청도 못했는데, 신문 기사 보고 일부러 찾아와주셨더라고요. 늦었지만 국제민중법원 실행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아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함께하고 싶다며 흔쾌히 이름을 올려주셨어요.”

- 지난해 한·일 정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조선인 위령비 앞에서 공동참배를 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추석 원폭 피해자들을 영빈관으로 초청하기도 했죠.

“공동참배를 한 건 뜻깊은 일이지만, 한국 대통령이 자국 내 원폭 피해자들 상황을 제대로 알고나 참배했느냐 이겁니다. 영빈관으로 초청한 것도 그냥 한번 만나준 걸로 끝이에요. 우리 요구에 대해 이후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어요. 나라가 아무리 잘살아도 국민을 돌보지 않으면 그게 나라입니까. 국가 아니지요. 저는 이제 살날도 많지 않고, 보상금도 필요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역사를 보존하라 이겁니다. 조선인들이 어떻게 이역만리 남의 나라에서 원자폭탄을 맞게 됐는지, 그 후 피해자들이 핵무기 때문에 어떤 고통 속에 살아왔는지, 역사로 남기라 이겁니다.”

정유진 논설위원

정유진 논설위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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